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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세묘기(雞林世廟記)

계림세묘기(雞林世廟記)

雞林世廟記

 

雞林本始林新羅脫解王乙丑金氏始祖大輔公誕降于是有雞櫝之異故改始為

雞今有大輔公碑閣及遺墟碑地在慶州府内面校里味鄉王陵崇惠殿亦在同面皇

南里而殿參奉味鄒文武敬順三王大輔公及三王之同德宜可百世崇奉則始林及

陵殿實金氏莫重之聖地也歷代國為守護閻茂變革後守護疎闊幾至荒廢其後孫

前郡守翰殷氏慨然設報本會圖永護策諸金氏無不響應乃先讓受雞林設棚防衛

復重修陵殿而於殿南買磷接地作廟五梁三間肇慶門及庫子室各三間大門一間

其他設備極其崇嚴祀大輔公號曰雜林世廟蓋取誕降地名也始工於己卯五月

二十日竣工於翌年四月十四日費略五千餘金人成日盛矣哉翰殷氏素强毅沈勇

有根天之誠力過人之手腕故能成此事業而諸金氏為先之誠意亦可敬也翰殷氏

以庚辰三月十二日病卒其宗人吴淵氏始終同事功既完諗于翰殷氏肖胤榮燾君

以記屬余余辭以不文或有駁之曰世廟之作非禮也何記之為朱子謂始祖之祭似

楴覺得似僭不敢祭又日始其之祖只存得墓祭今為始祖作廟據於何禮且稱世廟

郎世室之謂也禮無私廟世室之稱何以得稱世廟余曰否禮情為本而時為大情何

以義起而禮可以時變也叢薄瞽祝亦皆有廟况目見始祖誕降之地荒廢湮沒沁沁

然無感觸于情乎觸于情而思保護因起追遠之心而作廟此所謂緣情而義起也且

大輔公如殷之契周之稷而味鄒時追尊為太王故奉之以王禮而稱世廟欲後人之

思其名而氷世祀也非據於世室者也世室者世世宗祀之稱而此則無宗主五貫同

氏所公共伸其情義者也實無嫌逼有何不可駁者默然而退榮燾君請記其說以為

後來之解說余辭不獲遂書之如右

大輔公誕降後千八百七十六年庚辰七月上澣 醒石 李載榮記

 

계림세묘기林世廟記)

 

계림은 본래 시림이다신라 탈해왕 을축년(서기六五)에 김씨 시조 대보공이

이곳에서 태어났다닭이 울며 금궤의 괴이한 일이 있었음으로 시()자를 고처

()자로 바꿨다지금 대보공의 비각 및 유허비는 경주부 내면 교리에 있고

미추왕릉과 승혜전도 동면 황남리에 있다그리고 전참봉은 미추왕 문무왕

경순왕 세왕을 모시고 있다대보공 및 세왕은 덕()이 같으니 마땅히 오래도록

숭봉(崇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계림과 왕릉 및 전은 실제 김씨의 막중한 성지(聖地)이다.

역대로 나라에서 수호했으나 세상이 크게 변혁을 겪은 후 수호하는 것이 점차

소홀하여 거의 황폐될 지경에 이르렀다경순왕의 후손 전군수 한은(翰殷)씨가

이를 슬퍼하며 보본회(報本會)를 만들었다영원히 보호할 대책으로 여러

김씨와 상의하니 호응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이에 먼저 물려받은 계림에 나무울타리를 세워 방위하였다릉과 전은 다시

수리하고 숭혜전 남쪽 인접한 땅을 매입하였다묘우(廟宇)다섯보 삼간을 짓고

조경문(筆慶門및 고자실 각각 삼간을 지었다대문한간과 기타설비를 갖추니

그 높고 엄숙함은 극치를 이뤘다.

대보공 제사를 올리며 호를 계림세묘(雞林世廟)라 하였는데 대개 단장한 지명을

취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기묘년(一九三九二十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월 一四일에준공하니

비용은 대략 천여금()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한은(翰殷)씨는 참으로 대단 하도다” 라고 하였다.

본디 그의 성품은 강의(強毅)하고 용단이 있었다그리고 타고난 성심과 뛰어난

수완이 있었으므로 이같은 사업을 이룰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김씨들도 선조를 위하는 성의도 또한 공경할만하였다.

한은씨는 경진년(一九四월 十二일에 병으로 죽으니 그 종인 호연(昊淵)씨가

시종 이일을 말았다공사를 마치자 한은씨의 맏아들 영도(榮燾)군에게 알리고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나는 글을 잘하지 못한다하여 사양 하였다.


혹자가 이를 반박하며 말하기를 세묘(世廟)를 짓는 것은 예가 아닌데 어찌 기문을

지을 수 있습니까주자(朱子)는 시조에 제사 지내는 것은 체제와 비슷하다.

예에 넘치는 듯 함이 있어서 감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고하였다또 말하기를 처음 터를 정하신 시조께서는 묘제만 지낼수 있습니다.

지금 세묘를 세우는 일은 어느 예문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또한 이른바 세묘라는것은 세실(世室)을 두고 하는 것입니다예에 세묘를 세실이라고 일컫는 일은 없는데 어찌하여 세묘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고하였다내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예는 정()을 근본으로 삼고 때()는 큰 것을 우선으로 삼는다정은 의()에서 일어나고 예는 때의 변화에 알맞게 하는 것이다보잘 것 없는것에도 묘()가 있는데 어찌 시조가 단장 한곳이 황폐하고 자취가 사라져 마음 깊은곳에 감촉된 바가 없겠는가정에 감촉이 있으면 보호하려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로 인하여 추모하는 마음이 생겨 세묘를 지은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정에 따라 의사일어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대보공은 은()의 설()과 주()의 직()과 같고 미추왕때 추존하여 태왕(太王)되었다그러므로 왕의 예로 받들고 세묘(世廟)라 일컬었다.

세실(世室)을 근거로 한 것은 아니다세실이라는 것은 대대로 종사(宗祀)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종주(宗主)가 없다다섯 본관을 쓴 여러 종씨가 모두 함께

정의(情義)를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실제로 아무런 혐오되는 일이 없는데 어찌 불가 하다고 하는가고 하였다이에 그 소박한 사람이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영도(榮燾)군이 그 말을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의 해설을 삼도록 청하였다.

내가 사양했으나 뜻을 얻지 못하고 마침내 이와 같이 글을 썼다.

대모공 탄강후 一八七六년 경진(一九四월 상순에

성석(醒石이재영(李載榮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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