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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순 왕

경 순 왕

ma01.png 경순왕[敬順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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敬順大王 影幀 [慶州市皇南洞崇惠殿內所藏]

 

경기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사적 제244호.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능.

출생-사망 : ? ~ 978

국  적 : 왕조 신라

본  명 : 김부(金傅)

재위기간 : 927년∼935년

활동분야 : 정치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다. 시호는 경순(敬順)이며, 효애(孝哀)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이름을 따서 ‘김부대왕(金傅大王)’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찬(伊飡) 김효종(金孝宗)이며, 어머니는 제49대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의 딸인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서발한(舒發翰) 김인경(金仁慶)의 아들인 김효종이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부잣집에 자신의 몸을 팔아 종이 된 효녀 지은(知恩)의 몸값을 갚아 양민으로 만들어주자,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이 이를 대견하게 여겨 그를 헌강왕의 딸과 결혼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비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고려에 투항하기 전에 이미 마의태자(麻衣太子) 등의 왕자가 있었다. 고려에 투항한 뒤에는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 왕건(王建)의 맏딸인 안정숙의공주(安貞淑儀公主)와 아홉째 딸인 왕씨 부인을 아내로 맞이했으며, 고려의 제5대 경종(景宗, 재위 976∼981)의 왕비인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 등을 낳았다. 《삼국유사》에는 경순왕의 막내왕자는 신라가 망한 뒤에 출가하여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을 사용했으며,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927년(경애왕 4) 음력 9월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살해당한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신라는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때부터 고려의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래서 927년 음력 정월에는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그를 돕기도 했다. 그러자 견훤은 그해 음력 9월에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해 경애왕과 왕비를 죽이고, 경애왕의 이종사촌인 경순왕을 왕으로 세웠다.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경애왕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르고, 자신의 아버지를 신흥대왕(神興大王), 어머니를 계아태후(桂娥太后)로 추봉했다.

 

견훤은 고려의 원병이 오자 금성에서 물러났으나, 계속해서 신라를 침범해왔다. 927년 음력 12월에 견훤은 다시 대목군(大木郡, 지금의 경북 칠곡)을 쳐들어왔으며, 928년(경순왕 2)에는 강주(康州, 지금의 경남 진주)의 장군(將軍)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투항했다. 견훤은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갔으며, 겨울에는 무곡성(武谷城)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929년(경순왕 3)에는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경북 문경)을 에워싸고 공격해왔다.

이렇듯 견훤의 계속된 침공으로 국가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면서 신라의 장군과 관리들은 잇달아 고려로 투항했다.

930년(경순왕 4) 봄에는 재암성(載巖城)의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로 투항했고, 가을에는 동해 연안의 주(州)와 군(郡)이 모두 고려로 투항했다.

 

931년(경순왕 5) 왕건이 금성을 찾아오자 경순왕은 그를 만나 연회를 베풀고, 사촌동생인 김유렴(金裕廉)을 볼모로 딸려 보냈다. 왕건은 그해 음력 8월에 사신을 보내 경순왕과 관리들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이 무자년(戊子年)인 928년(경순왕 2)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930년 정월 고려는 고창(古昌, 지금의 경북 안동)에서 후백제에 큰 승리를 거두었고, 그 뒤 고려는 후백제에 우위를 차지하며 세력을 더욱 넓혔다.

 

934년(경순왕 8)에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熊津, 지금의 충남 공주) 이북 운주(運州, 지금의 충남 홍성)의 30개 군현(郡縣)이 고려로 투항했다. 935년 음력 6월에는 견훤이 아들인 신검(神劒)에 의해 금산사(金山寺)에 갇혔다가 고려로 도망쳐 투항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상보(尙父)라 높여 부르고, 양주(楊州, 지금의 경기도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주며 남궁(南宮)에 머무르게 했다.이렇게 고려의 세력이 커지자 경순왕은 935년 음력 10월 나라를 보존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신하들과 함께 고려로 투항할 것을 의논하였다.

 

신하들의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서서 반대했으나 경순왕은 시랑 김봉휴(金封休)를 시켜 왕건에게 투항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왕건은 섭시중 왕철(王鐵)과 시랑 한헌옹(韓憲邕) 등을 보내 이에 응답하였다.

 

경순왕은 음력 11월에 문무백관과 함께 금성을 떠나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으로 향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경순왕의 행렬이 30리가 넘게 이어졌으며, 구경꾼이 몰려나와 울타리를 두른 듯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이 송악에 도착하자 왕건은 교외로 나가 그를 맞이했으며, 도성으로 불러들여 유화궁(柳花宮)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신명순성왕후(神明順成王后) 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맏딸로 낙랑공주(樂浪公主)라고도 하는 안정숙의공주를 시집보내 경순왕을 사위로 삼았다.

《삼국유사》에는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산다고 어미에게서 떨어져 사는 난조(鸞鳥)에 비유해 공주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쳐 불렀으며, 시호를 효목(孝穆)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에는 왕건이 경순왕에게 신란궁(神鸞宮)을 지어 주었고, 공주를 신란궁부인(神鸞宮夫人)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순왕은 음력 12월에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해지고 1천 석의 녹봉을 받았다. 경순왕이 왕건의 신하가 되면서 신라는 경주(慶州)로 개칭되어 경순왕에게 식읍(食邑)으로 주어졌다. 《고려사》에는 음력 11월에 경순왕이 왕건에게 왕업의 보존이 어려우니 신하로 받아들여달라고 청했으나 왕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음력 12월 12일이 되어서야 신하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이를 승인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때 경순왕을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임명해 부호장(副戶長) 이하 관직에 관한 업무를 맡게 한 것에서 고려의 사심관 제도가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경순왕은 왕건이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홉째 딸도 아내로 맞이했다.

 

《고려사》에는 937년(태조 20) 음력 5월에는 진평왕(眞平王)이 차던 허리띠로 알려진 성제대(聖帝帶)를 왕건에게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천사옥대(天賜玉帶)라는 명칭으로 기록된 이 허리띠는 장육금상(丈六金像), 황룡사 9층탑(皇龍寺九層塔)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보물로 꼽히던 것이었다.

 

경순왕은 왕건의 손자인 경종이 즉위한 975년(경종 1) 음력 10월에 상보(尙父)·도성령(都省令)의 직위와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推忠順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받았으며, 이전 것과 합하여 모두 1만호의 식읍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978년(경종 3) 음력 4월에 죽었고, ‘경순’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오늘날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에 위치한 연천 경순왕릉

 

경순왕릉(敬順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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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敬順王陵)경기 연천군 장남면 장남로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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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순왕(敬順王 제56대)

○ 927년에 즉위하였다. 이름은 부(傅), 문성대왕의 후손(6대손)이고, 아버지는 이찬 효종<조부라는 설도 있음>, 어머니는 계아태후이다. 왕은 견훤(甄萱)의 소거(所擧) 로 즉위하였다.

○ 원년(927) 11월에 왕은 선고(先考)를 추존하여 신흥대왕이라 하고 모를 왕태후로 하였다.

○ 2월에 태조는 왕에게 사신을 파견하여 (고창군 병산 전투) 승리한 것을 알리니, 왕은 이를 사례하고 아울러 서로 한번 모일 것을 청하였다.

○ 5년(931) 2월 고려 태조는 50여기를 거느리고 경기에 이르러 배알할 것을 청하므로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술을 권하였다.

○ 9년(935) 10월에 왕은 사방의 강토를 거의 다 남에게 빼앗겨 국세가 고약(孤弱)하여 능히 자안(自安)하기 어렵게 되자 군신들과 더불어 그 대책을 논의하기로 국토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자고 하였는데 군신들은 의논하기를 혹은 이를 옳다하고 혹은 이를 옳지 않다고 하였다.

○ 11월에 태조는 왕서를 받고 대상왕철(大相王鐵) 등을 보내어 이를 영접하였다.

○ 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을 떠나 태조에게 귀부하는데, 향차보마(香車寶馬)가 30여리에 연하고 도로는 막히고 구경하는 사람은 담을 둘러 싼 것 같았다.

○ 태조는 교외로 나와 왕을 맞아 위로하고 궁동(宮東)의 갑제<으뜸가는 집, 유화궁> 1구를 내리고 장녀 낙랑공주로써 그의 아내로 삼았다. 12월에는 정승공을 봉하니 그 위는 태자의 위에 있게 되고, 또 녹1천석을 주고 시종·원장도 모두 채용하였으며, 신라를 고쳐 경주라 하여 왕의 식읍으로 하였다.

○ 경종 헌화대왕은 정승공(경순왕)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으며, 곧 정승공을 봉하여 상부령(尙父令)으로 삼았다.

○ 공이 송(宋) 태종 흥국(太宗 興國) 4년(978, 고려 경종 4년) 무인에 돌아가니 시호를 경순(또는 효애)이라 하였다.

 

【史臣의 論】

경순왕이 태조(고려)에 귀의함과 같은 것은 비록 마지못하며 한 일이지만 또한 가상(嘉尙)하다 하겠다. 만일에 그가 역전사수(力戰死守)하여 왕사(고려)에게 항거하다가 힘이 굴(屈)하고 형세가 궁함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그 종족이 박멸되고 해가 무고한 백성에까지 미쳤을 것인데, 고명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바치니 그는 조정에 대하여 유공함과 생민에게 유덕함이 매우 컸었다. 옛날 전(錢)씨가 오월의 땅을 들어 송에 바친 것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이라’고 말한 일이 있지만 지금 신라의 공덕은 저 오월보다휠씬 지나침이 있다. 우리(고려) 태조는 비빈이 많고 그 자손도 번성하여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 왕위에 올랐거니와 그 후 대통을 이은 이가 다 그 자손이었으니 어찌 그 음덕의 갚음이 아니겠는냐.

☞ 敬順王誕降日이 882年壬寅4月6日生이란 설이 있다.

 

2. 경순왕릉

○ 종 목 : 사적 244호(1975. 6.25)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 산18-2.

신라 제56대 경순왕(敬順王 927~935)의 능(陵)이다.

 

공이 고려 경종 3년(978. 4. 4) 별세하자 시호(諡號)를 경순(敬順)이라 하고 왕의 예로서 장례를 모시고 능을 조영(造營)하였으나 오랫동안 잊혀져 있다가 조선 영조 23년(1747) 감사 김성운과 첨정 김응호 등이 봉축하고 제사하였으나 6.25후 방치 되었다가 1975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지금의 형태로 정화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덤은 높이 3m, 둘레 19.5m, 외형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 밑둘레에는 판석(板石)을 이용하여 무덤보호를 위해 병풍처럼 돌렸고 능 주위로는 곡장(曲墻)이 돌려져 있다.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이 놓여 있고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이라고 새긴 표석(105 .857cm)이 세워져 있는데, 뒷면에는 5행으로 경순왕의 간략한 생애를 기술한 87자의 음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표석의 내용에 의하여 경순왕의 무덤임이 확인되었고, 1747년(영조 23)에 이 비를 세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능 앞에 있는 기타 석물로는 장명등(160cm), 석양(105?cm) 및망주석(150cm) 2개가 마련되어 있다.

 

신라 왕릉의 경우 곡장이 마련된 것이 없으나,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왕릉에 비로소 곡장을 마련하고 있어 묘비에서와 같이 경순왕이 죽자 왕의 예로서 무덤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좌측에는 1986년에 새로 건립된 1칸 규모의 비각과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형지붕으로 된 재실이 있는데, 비각 안에는 경순왕의 신도비로 추정되는 비가 있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계속 방치되어 오던 것을 원당리 고랑포 초등학교 교정에 옮겨 보호해 오다 1986년 비각을 새로 건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겨와 보존하게 된 것이다. 대좌는 최근에 화강암으로 다시 마련하였고 비신은 높이 132cm, 폭 66cm, 두께 15cm 규모에 상단을 모죽임한 변성암재질로 되어 있다. 비문은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10자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옛 고랑포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곳에 잘 정비되어 있다

 

○ 경순대왕 릉비

- 전면 : ‘新羅敬順王之陵(신라경순왕지릉)’

- 후면 역문.

 

경순왕은 신라 56대왕으로 후당(後唐) 천성(天成) 2년 무자(戊子=928년)년에 경애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고 청태(淸泰) 을미(乙未=935년)년에 고려에 양위하셨고 송나라 태평흥국 무인(戊寅)년(서기978년) 고려 경종3년 4월 4일에 흉사하시었거늘 시호를 경순(敬順)이라하고 왕례로서 장단 고부 남8리에 계좌(癸坐)之原에 장사하였다.

 

지극하신 행실이요 순진하신 덕이리라

영명(英明)하신 모법(模法)이 굳세고 빛나리라.

성상(聖上;영조) 23년 정묘(1747년) 4월4일 개립(改立)하다.

 

○ 경순대왕릉을 발견한 안동인 김굉(金?)

 

 

【경순대왕 능지(敬順大王 陵誌)】

신라 제56대 경순대왕의 능은 경기도 장단면 남8리(현 경기도 연천군 고랑포리) 성거산(聖居山) 줄기의 회장산(花藏山)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 화장산은 동쪽에는 연천강과 월봉산(月峰山)이 있고, 서쪽에는 성거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임진강이 흐르고, 북쪽에는 金陵坡(금릉파)가 있는 지역으로 성거산의 한 줄기가 서남쪽으로 흘러내린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지사(地師)들의 말에 의하면 일명 화장룡(花藏龍)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은 팔백연화격(八百蓮花格)이요 금계포란형국(金鷄抱卵形局)으로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고려 경종 3년(978) 음력 4월4일에 대왕께서 승하하시자, 이곳에 대왕례(大王禮)로서 인산(因山)하여 능(陵)을 조성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실전되었던 것을 조선조 영조 3년(1727) 에 후손(안동인) 김굉(金?)이 [경순대왕장지(敬順大王藏之)] 라는 6자가 각자된 지석(誌石)을 발견하고 영조 23년(1747)에 영역을 찾아내어 영조대왕께 수치소(修治疏)를 올렸다.

 

영조대왕께서는 김성운(金聖運 강원·충청감사), 김응호(金應豪 첨정) 등으로 하여금 능묘(陵墓)를 봉축하게 하고, 장단부사 심봉징(沈鳳徵)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으며, 그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1일과 10월1일에 춘추 향사(享祀)를 올리고, 관군(官軍)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하였다.

 

【족보기록】

 

士衡(사형)-陞(승)-宗淑(종숙)-?(무)-義錫(의석)-淪(윤)-應天(응천)-孝祥(효상)-?(굉) ?(굉)

忌十二月十七日 墓長湍郡津東面哨里城村酉坐

敬順王陵失傳久遠始尋塋域修治守護自公以始

 

(1) 김굉(金?)

김굉(金?)은 익원공 휘 사형의 8대손이며 동추공(同樞公) 휘 종숙의 5대손이고 묘는 장단군 진동면 초리에 있다. 경순왕릉이 실전 된지 오래 되었는데 무덤을 찾고 수치, 수호한 것이 공으로 부터이다.

(2)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1727년 영조 3년 후손 안동인 김굉이 실전된 경순왕의 지석을 발견하다.

-1746년 영조 22년 동지(同知) 김응호(金應豪)가 신도비를 발견하다.

-1747년 영조 23년 왕이 경순왕(敬順王)의 묘(墓)를 수치(修治)하도록 명하다.

-1757년 영조 33년 왕이 경순왕의 묘에 제물과 제문을 내리다.

 

3. 경순왕 영정

(1) 경순왕 영정 사실기

경순왕의 영정은 본전(숭혜전)에 봉안한 것이 도합 4본이다. 원본은 은해사(銀海寺)로 부터 옮겨왔고, 정조18년 갑인년에 2본을 다시 본떠서, 1본은 본전의 감실에 보관하고, 1본은 임금님이 보신 후 다시 본전에 보내어 구본과 함께 궤안에 봉안하였다.고종40년 계묘년에 다시 1본을 본떠서 본전 감실에 봉안하고 구본은 궤안에 봉안하였다. 순천 송광사에 또 경순왕 영정이 1본 있으니 이는 후손 한장(漢章)이 기증한 것이다. 원주 용화사 고자암에 또 1본이 있으니 후손 사목(思穆)이 기증한 것이며, 또 하동 쌍계사에 일찌기 1본이 있었는데 연전에 본전으로 옮겼다가 하동 경천묘에 봉안하였다.

 

(2) 寶鑒 第二輯 영정

1976년 10월 대종회에서 발간한 寶鑒 第二輯에 있다.

 

(3) 영주 자인전(慈仁殿)

경상북도 영주시 영주동 99에 위치한 자인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으며 창건년대는 알 수 없다.

 

(4) 원주 황산사지(原州黃山寺址)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주포리 산 25-2에 위치한 황산사는 신라 경애왕대(924-926)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순왕의 공주가 이 절에 와서 부왕의 존상을 산정 석벽에 조각케 하였고, 그 후 경순왕이 직접 이곳에 와서 존상을 보고 환경한 후부터 산명을 대왕산(大王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귀한 분이 왔다 하여 동리 이름을 귀래(貴來)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5) 경주 숭혜전(崇惠殿)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216에 위치한 숭혜전(崇惠殿)은 신라 미추(味鄒)·문무(文武)·경순왕(敬順王)의 어진 정치를 회모(懷慕)하여 영당(影堂)을 건립하고 춘추(春秋)로 후손들이 모여 제사하는 곳이다. 효종(孝宗)연간에는 영천(永川) 은해사(銀海寺)의 영본(影本)을 모사하여 묘(廟)에 봉안하였다.

 

(6) 포항 형산 왕룡사

형제산은 포항시와 경주시의 경제에 위치해 있다. 형산강 어구의 남쪽에 북형산성이 있고, 김부대왕 즉 경순왕을 모신 용왕사가 잇는 산을 북형산(고려 때부터는 '형산'이라 부름) 이라고 한다. 형산 산정의 왕룡사라는 절에는 김부대왕과 김충 태자의 목상을 세워 제향을 하고 그 유덕을 추모하고 있다.

 

(7) 하동 경천묘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107-1번지에 위치한 경천묘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영정 봉안소로 고종 39년(1902)에 건립하였다. 경순왕은 용화산 학수사로 가서 여생을 마쳤다. 그 뒤 사람들이 왕을 추모해 학수사에 사당을 세워 모셨으나 후세 사람들이 청암면 중이리 검남산 밑으로 옮겼다. 지금 건물은 1988년 하동댐 건설로 다시 옮긴 것이다.

 

(8) 시흥 군자봉 성황제

경순왕이 죽자 안씨 부인이 마을 뒷산인 군자봉에 올라가서 매일 치성을 드렸다. 얼마 후 내의시랑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출행하게 되었는데 그 때 안씨 부인의 영혼이 나타나 사행(使行)길을 도와주어 그 은공으로 군자봉 정상에 당을 마련하고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 부인의 소원당(所願堂)을 지어 주자 인근의 주민들이 해마다 음력 2월에 성황신인 경순왕과 안씨 부인, 장모 홍씨의 영정을 모시고 마을로 내려와서 제를 지낸 후 유가(遊街)를 돌다가 삼월 삼짇날이 되면 다시 모셔 올렸으며, 소원당에 불을 놓기 전에 소원당에 모셔 놓았던 경순왕과 안씨부인의 영정의 복사본을 만들어 숨겨 두는 등 군자봉 성황굿을 지켜가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다가 일경들에게 수차례의 곤욕을 치루었다.소원당이 불에 타버리자 곽명월은 자신의 집에 영정을 모시고(현 김순덕의 당이 당시 조모 곽명월이 영정을 모시고 당을 지키던 자리이다) 군자봉 성황제를 지켜왔다.

 

(9) 도라산 전망대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 경종 3년(978)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4. 경순대왕 유적

경순대왕은 만년에 명산을 유력할 때 제천에 이르러서 별궁을 짓고 뱃재(拜峙배치)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龍華山(용화산=미륵산)이 마치 용이 꼬리를 치는 형상이라 그 정상에 올라 암벽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앞에 高自庵(고자암)을 세웠으며 산 밑에 鶴樹寺(학수사=황산사지)를 창건하였는데, 대왕은 매일 고자암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뱃재(배치)에서 미륵불을 망배하였다고 한다. 이 원주와 제천 일대는 비운의 경순대왕의 만년의 유적지이자 성역이 분명하며 사적지 지정과 성역화 작업등 보호조치가 요청된다.

 

(1) 미륵불상(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2호)

미륵산 정상(해발 689m)의 절벽 (높이 15,6m)에 동향으로 높이 48척의 초대형 미륵을 새겼는데, 코의 길이만 해도 사람의 키를 넘을 정도로, 가까이에서는 그 모양을 알아볼 수가 없고,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형체를 알 수 있다.

 

(2) 고자암(高自庵)

대왕은 미륵불 앞 약 1km 거리의 산복(山腹 주포리 산 25의2)에 고자암을 세웠으며, 암장에는 대웅전 산신각 등의 건물이 있었는데, 1986년 6월 중건을 위하여 퇴락한 원 건물을 철거하였다는 것이며, 현재는 寺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고자암에는 경순대왕의 영정각이 있었는데, 조선조 때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眞影과 함께 경상남도 하동 경천묘로 이봉되었다.

 

(3) 황산사지(-黃山寺址 鶴樹寺)

대왕은 또 산 밑 주포리에 원당인 학수사를 창건하였으며, 현재 사찰 건물은 없어지고 寺址만이 남아 있는데 초석 5기가 현존하며, [절안] 또는 [황나절터] 라고도 한다. 현재 民家가 들어서 있다.

 

(4) 이궁(離宮, 別宮)

충청북도 제원군 백운면 방학리(放學里) 650번지 궁뜰(宮坪-궁이 宮野)에는 이궁의 옛터가 있는데 그곳 김중식씨 家에 이궁의 것으로 보이는 옛 장대석 4개가 있다.

 

(5) 동경저(東京邸)

제원군 백운면 방학리 591번지 부수동(富壽洞)에 동경저(東京邸, 저택)의 옛터가 있는데, 현재 수령 1천년 정도의 은행나무 고목 한 그루와 조각된 돌로 만들어진 옹달샘 하나가 현존하여 영고성쇄의 무상을 말해 주고 있다.

 

(6) 배치(拜峙)

백운면 화당리(花塘里) 서쪽 원주군 귀래면 경계(대호지 부락에서 서쪽 1km) 에 拜峙(배치)라는 고개가 있다. [국립지리원 지명유래] 및 [충청북도 전설지]에 의하면 대왕은 미륵산 정상에 미륵불을 새기고 그 아래 고자암에 종을 달게 하여 매일 조석으로 스님을 종을 치게 하였는데 대왕은 배치에 나가 있다가 종소리가 들리면 미륵불을 향하여 望峙하였다고 하며, 이후 후세 사람들이 이 고개를 拜峙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항의 미륵산은 미륵봉을 주봉으로 좌우 12개의 높은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佳景이 많아 탐방객이 수없이 오르내린다고 하며 貴來面의 지명도 貴人(경순대왕)이 온 곳이라 하여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7) 경주 불국사 경순대왕 유품(遺品) 기록

경주 불국사에 경순대왕의 유품이 다음과 같이 소장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확인한바 현존하지 않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찰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唐靴(당화)1쌍○金螺杯(금라배-술잔)○玉佩(옥패)○水晶影子(수정영자-갓끈을 꿰는 수정부품)

 

 

5. 경순왕 전설

경순왕신(敬順王神)은 무속에서 신으로 받들게 되는 왕신이시다.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나라를 고려에 넘겨준 왕이나 그는 이미 시운이 다한 나라를 전쟁의 참화에서 피하게 하여 백성을 보호한 점에서, 백성들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그가 죽은 뒤 그의 유적지 곳곳에 사당이 세워지고 여러 전설이 생겨났으며, 신령으로 모셔졌다. 그리하여 시호를 올리기 이전의 그의 칭호에 따라 김부대왕(金傅大王)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무(韓國巫)의 신령이 되었다.

그를 숭배하는 지역은 경상북도의 경주·포항·영풍·월성 등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와 충청북도의 제천·청풍, 경기도의 안산과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에 이른다.

경주에서 포항에 이르는 지역의 주민들은 경순왕을 인근의 형산(兄山) 옥련사(玉連寺)에 신으로 모시고 기원을 드린다.

 

전설에 의하면, 형산과 강 건너의 제산(弟山)은 원래 연결되어 있어, 비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안강(安康)벌까지 수해를 입었다. 그런데 하루는 경순왕신이 용으로 변해서 그 꼬리로 두 산을 끊어 놓아, 물이 그 사이로 해서 바다로 빠지게 하였다 한다. 이 전설은 경순왕이 죽어서도 백성을 보살펴주는 신령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상북도 영풍시 영주면 영주리에는 목조기와로 된 자인전(慈仁殿)이 있는데, 그 곳에 경순왕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다.

 

충청북도 청풍의 덕주사(德柱寺) 뒤편에도 김부대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던 것과 강원도 인제에 김부대왕동(金傅大王洞)이 있었던 사실, 그리고 충주·제천 등지에도 경순왕의 여러 유적과 전설이 있었음을 ≪오주연문장전산고 五州衍文長箋散稿≫는 전한다.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의 군자봉 꼭대기에는 서낭당터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경순왕이 모셔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그리고 김부대왕은 오늘날 무당들이 그리 명확하게 신앙하지는 않지만, 조선말과 일제시대에는 영험이 높은 신령으로 받들어졌다.

 

《참고문헌≫ 五州衍文長箋散稿, 文化遺蹟總覽 上·中(文化財管理局, 1977), 韓國民俗大觀 3-民間信仰·宗敎篇-(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1982), 朝鮮巫俗考(李能和, 啓明 19, 啓明俱樂部, 1927). 趙興胤》

 

(1) 도라산에 얽힌 전설

신라가 경순왕 10년(879)에 폐망하자 경순왕의 11왕자는 사분오열로 뿔뿔히 흩어지니 할 수 없이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천리길 송도를 찾아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유화관(柳花官)을 하사하였으며 정승을 봉하는 한편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낙랑공주는 비운을 맞게 된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고저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지었으며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 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곳에서 고려경종 3년(935)에 경순왕이 돌아가시니 고랑포 뒷산 아늑한 골짜기 남향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안장 되었으며 낙랑공주는 영수암이 훼손함에 따라 아담하게 새로 절을 건립하여 경순왕의 화상을 모시고 명복을 기원하는 한편 영원히 번창하라는 뜻에서 창화사(昌化寺)라 호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조 말까지 임갑진 스님이 수호 관리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창화사는 전란으로 소실되었으며 경순왕릉은 영조대왕이 복원한 후 민통선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군인들이 수호 관리하고 있다.

 

(2) 성곡동과 君子峰에 얽힌 傳說

경세제민의 경륜을 간직하면서도 국가와 백성의 안일을 위하여 스스로 왕관을 벗어버리고 신라 千年의 사직을 손국(遜國)한 신라의 56대 마지막 임금 경순대왕(敬順大王)과 안씨빈(安氏嬪)의 얽힌 애환과 서희장군과의 사연을 담은 전설이 안산시 성곡동 산 76번지에 위치한 잿머리 성황당과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의 성황당에 전해지고 있다.

 

서희(徐熙)장군대왕이 宋(송) 나라 사신으로 출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安氏嬪(안씨빈)의 영혼이 나타나 그에게 많은 奇行異蹟(기행이적)으로 행차 길을 도와주었다. 안씨빈의 顯靈(현령)과 서희 장군이 약속하기를 경순대왕의 影幀(영정)과 안씨빈의 所願當(소원당)을 지어주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희 장군이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와 두 곳에 성황당을 지어 주었다. 이로 인한 성황당이 현재에도 두 곳에 남아 있다. 한편 고려조에서는 그의 外交功行(외교공행)에 안씨빈의 도움이 있었다하여 안씨빈이 살던 獐口郡(장구군)을 案山郡(안산군)으로 개칭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매년 10월이면 경순왕의 영정과 안씨빈 영정 및 안씨빈 친가 어머니인 洪氏(홍씨)부인 혼령에게 천여년간을 매 년 한 해도 빠짐없이 성곡동 성황당과 군자봉에서 洞祭(동제)를 지내오고 있다

 

제 목 : 숭혜전의 창시와 연혁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양국한 후에 옛 도읍의 유민들이 왕께서 백성에게 베푼 덕의를 사모하여 월성에 사당을 세워 영정을 모시고 매양 명절에는 고을의 아전이 삼반관속(三班官屬)을 이끌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는 초나라 사람들이 일간모옥(띠로 지붕을 이은집)에서 초나라 소왕(昭王)에게 제사지낸 의에서 나온 것이다. 불행히 임진왜란에 묘우가 불탔으며 그후부터는 제향올리는 의식을 화상(畵像)으로서 하지 아니하고 나무로 만든 위패로서 봉행하였다.

 

천계(天啓) 7년(인조5년 1672년) 정묘에 후손 김시양이 경주부윤으로서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중건하기를 계청(임금에게 아뢰어 청함)하였으며 본부의 유생 김성원 등으로 더불어 경주부의 동쪽 5리쯤 되는 금학산 아래 동천촌에 터를 잡고 사당을 옮겨 일신하게 중건하였다.그리고 참봉 1인을 두어 제향을 받들게 하였고(예조에서 차출하였음) 또 노비의 전지를 설치했으며, 제전(祭奠)은 관에서 담당하여 변. 두(대와 나무로 만든 제기) 각 7기로 한정하였다.

 

그후 97년째 되는 경종 3년(1723년) 계묘에 본도감사 조태억(趙泰億)이 순행하다가 본부에 이르러 왕의 사당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계(임금에게 올리는 글)로서 청원하여 특히 경순왕 전호(殿號)의 선액(임금이 내린 선호)을 받았으며 요미(料米)와 말먹이는 콩도 모두 일정한 수량이 있었고 유생51인과 수호군 20인과 전졸 6명을 두었다.

 

정조 18년(1794년) 갑인에 정전 후면에 사태가 떨어지는 환난으로서 참봉 김건항(金健恒)이 궐문에 호소하였고 도신(道臣)이 장계를 올림으로써 특히 이건(李建)하라는 분부를 받들어 본도 감사 조진택(趙鎭宅)으로 하여금 터를 잡아 계문(啓聞:임금에게 아룀)하게 하였으며(곧 황남성) 본부윤 송전은 기일에 어긋날까 두려워하였다.

또 장수승(長水丞) 이명기(李命基)에게 분부를 내려 왕의 화상을 다시 본뜨게 하였다. (왕이 일찍이 영천 불당의 후면 감실(위패나 영정을 모시는 방)에 간직했다가 본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 그후 17년 만에 본전을 이건하였고 화상도 연구세심(年久歲深)하여 빛깔이 변했으므로 이분부가 있게 되었다.

 

5월 18일 역사를제시작하여 3개월 만에 낙성하여 [ 묘우(廟宇)가 오가삼간(五架三間)이요 내외 신문(神門)이 각 3칸이며 동서재가 각 4칸이요 가관방(假官房)이 삼칸이며 제기고(祭器庫)와 주장고(酒醬庫)가 각 1칸이요 고사(庫舍)가 2칸이며 공수(公須)가 2칸이요 주(廚)가 1칸이며 대문이 1칸이요 좌우내문이 2칸이며 마구(馬廐)가 2칸이었다.] 준공을 고하매 임금께서 친히 축문을 짓고 향을 내렸으며 8월초 10일 황남전에 봉안하였다. (위판은 정당의 당중에 모시고 영정은 정당의 후벽 감실에 모셨음.)

 

다시 예조에 분부를 내려 규식(規式)을 정하게 했으니, 유생과 전졸은 각각 90여인이요 수호군 1백여명과 양정(良丁) 20명과 하전(下典) 60명을 두었으며 호세는 오결(일결은 열 묶음)을 면제하게 하였고 참봉은 이조로부터 직첩을 내렸다.(또 가관 1인을 두어 참봉이 유고할 때에는 분향을 대행하게 하였음.) 요미는 날마다 일석14두요 마태(馬太)는 10두이며 또 백미 262석을 하사하여 공장의 식량 및 공역의 용도에 충당하게 하였고(공장의 식량이 43석이요 공역의 용도가 219석이었음.)

 

무릇 공비(公費)가 10만8천6전 남짓하였다.(성손이 4만3천6백전을 기증하였고 참봉 김성휴가 만전을 희사하여 공역을 준공하여음. 정조 4년(1780년) 경자에 부윤 김효대(金孝大)가 동천전에 비석을 세우는 일로서 소청(疏請)하여 곧 윤허(임금이 허락하심)는 얻었으나 공역을 갖추지 못한 때문에 분부가 내린 후 35년째되는 갑술년(순조14년 1814년)에 이르러 황남전 정문 밖에신도비를 세우게 되었다.순조 3년(1803년) 계해년에 계림에 유허비를 세웠다.

 

신도비각은 1동 8면으로 되어 심히 치려하고 웅장했으며, 유허비각도 또한 이 제도를 모방했으나 규모가 작았다.고종 24젼(1887년) 정해년 정언 김만제가 미추왕과 경순왕을 병향(幷享)하는 일과 전호를 소청하였고, 판부사 김홍집이 경연(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문무왕을 병향하는 일로서 진청하여 윤허를 받앗다. 이에 특히 본부윤 김철회에게 분부하여 묘우를 중건했으니, 오가오간(五架五間)이요 (동서재와 방과 곳간은 모두 잉구하였고 별달리 향축실 1칸을 사당 좌편에 건조하였음) 숭혜전의 선액(宣額)을 내렸으며 3왕의 위패를 만들고 경순왕의 영정을 다시 본떠서 무자년 8월초 10일을 택하여 변 8기와 두(豆) 8기를 갖추고 향과 축문과 폐백을 내려보내어 고유하고 봉안하였다. (영정의 감실은 본묘내 동벽 아래에 별달리 마련하였음.)

 

참봉은 전조(이조를 말함)로부터 별달리 지벌(地閥)과 문식이 있는 자를 택하여 차정하고 임기(50삭)가 차면 6품에 승진하였다. 전우(殿宇)의 수즙비(修葺費)는 규례에 의하여 마련하였고 호세 80결을 면제하기로 획정했으며 각 능소에 비석을 세웠고 병오년에 장예원으로부터 분부를 받들고 예관 김영래(金永來)를 보내어 전.릉의 경계를 사방 백보로 정하였다.

 

아! 경술년(융희4년 1910년) 이후에 제향의 경비를 춘추에 걸쳐 90원씩 관부로부터 의례 지출하였고, 병인년(1926년)에 비로소 축현릉 참봉을 두어 춘분과 추분에 석채례(釋菜禮)로 거행하고 제향의 경비 1백20원씩 의례 지출했으며 각 능마다 수호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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