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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세거지

주요세거지

계림군파(鷄林君派) ‘갑자보(甲子譜)’에 따르면 2세 김계성(金季誠)의 대부터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벽제읍(碧蹄邑)에 대대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가 5세 김홍령(金弘齡)의 대 이후로 수원시(水原市) 일원으로 옮겨갔고, 일부는 김귀령(金龜齡)의 대 이후 평택군(平澤郡)에 터를 잡았으며 김학령(金鶴齡)의 대를 전후하여서는 용인군(龍仁郡)에 세거한 것 같다.

김숭연(金崇連)은 연산군조(朝)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평남 가산(嘉山)에 세거하기 시작하였고 김영수(金永繡)의 대 이후로는 홍주(洪州)에 터를 잡은 것 같다.

 

6세 김억수(金億壽)의 대 이후 안성군(安城郡)에, 김연수(金連壽)의 대 이후로는 서산군(瑞山郡)대산면(大山面) 일원에, 김수정(金粹精)의 대 이후에는 청양군(靑陽郡)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김봉수(金鳳壽)는 임진왜란 당시 충남 해미(海美)로 이거하였다.

7세 김경원(金慶元)의 대 이후 연기군(燕岐郡) 전의면(全義面) 일원, 김후원(金後元)의 대부터는과천(果川), 김감(金鑑)의 대부터는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사성면(士城面) 일원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7세 김구(金球)의 대부터 공주(公州)에, 김철원(金哲元)의 대부터 청주(淸州)에, 김인원(金仁元)의 대부터 결성(結城)에 터를 잡은 것 같고 김육원(金堉元)은 병자호란을 만나 상주(尙州)로 이거하였는데 지금의 문경군(聞慶郡) 산양면(山陽面) 일원에서 세거하였다.

 

8세 김의진(金義振)의 대 이후는 양주군(楊州郡) 화도면(和道面) 일원에 터를 잡았고, 김수성(金守誠) 이후 청원군(淸原郡)에, 김수겸(金守謙) 이후 홍천군(洪川郡)에 옮겨간 것 같다.김수준(金守俊)의 대 이후 보령군(保寧郡) 웅천면(熊川面)에 이거한 것으로 보이며,임진왜란 김수안(金守安)ㆍ김수향(金守香) 형제는 서산군(瑞山郡) 고북면(高北面)으로,김기성(金起成)은 평양(平壤)으로 옮겨갔다. 8세 김수익(金守翼)의 대부터는 김포군(金浦郡)에 터를 잡았던것 같다.

 

9세 김남훈(金南勳)은 포천군수(抱川郡守)를 지낸 후 그 곳에서 세거했고, 김남휘(金南輝)의 대 이후는 경산(慶山)자인면(慈仁面)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김남오(金南五)는 황해도 수천(遂川)으로 퇴거했으며,김남석(金南錫)ㆍ김남창(金南昌)ㆍ김남일(金南逸)은 경북 예천군(醴泉郡) 일원으로 옮겨갔다. 9세 김남운(金南運)은 화성군(華城郡) 송산면(松山面)에, 김남주(金南周)는 협천군(陜川郡) 삼가면(三嘉面)에, 김남령(金南靈)은 춘천(春川)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0세 김여진(金麗振)은 지금의 상주군(尙州郡) 공검면(恭儉面)에 옮겨가 세거했으며,김계진(金啓振)은 영풍군(榮豊郡) 순흥(順興)에 터를 잡았다.김준진(金俊振)은 아산군(牙山郡) 신창면(新昌面)에, 김이진(金履振)은 횡성(橫城)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1세 김언성(金彦星)의 대 이후로 창원(昌原)에 옮겨간 듯 하며, 병자호란 때 김승신(金承臣)은 양양군(襄陽郡) 위산면(位山面)에,김상신(金相臣)은 회양군(淮陽郡) 장양면(長楊面)에 이거하였다.

 

김봉신(金奉臣)은 장단군(長湍郡)에 터를 잡았고,김윤신(金潤臣)은 예산군(禮山郡) 대흥면(大興面)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연기군(燕岐郡) 전의면(全義面) 일원에서 세거하던 김명원(金命元)의 후손들은 12세 이후로 파주군(坡州郡) 교하면(交河面)ㆍ광탄면(廣灘面)일원, 온양(溫陽)ㆍ공주(公州)ㆍ여주(驪州)ㆍ광주(廣州)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했으며,김수겸(金守謙)의 후손들은 인제(麟蹄)회양(淮陽)ㆍ삼척(三陟) 등지에도 터를 잡았다. 한편 계림군파(鷄林君派) 갑자보(甲子譜)에 의하면 태사공(太師公) 김인관(金仁琯)의 9세손 상촌공(桑村公) 김자수(金自粹)의 후손은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1세 판관공(判官公) 김영년(金永年)의 대 이후로는 충북 영동군(永同郡)에 터를 잡았고,일부가 14세 김홍(金泓)의 대 이후로 보은군(報恩郡)에 이거한 것 같다. 11세 좌랑공(佐郞公) 김영원(金永源)의 자손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일원에서 세거했으며, 13세 김양건(金良健)의 대에는 순천(順天)에 터를 잡았고, 일부가 14세 김파(金坡)의 대 이후로 서산군(瑞山郡)에 이거했으며, 일부는 14세 김육(金堉)의 대에 경산군(慶山郡)에 옮겨졌다.

 

12세 계성군(鷄城君) 김임(金任)의 자손은 고양군(高陽郡)에 세거하였으며,일부가 14세 김적(金迪)의 대 이후로 포천군(抱川郡)에 터를 잡았고,일부는 김일(金逸)의 대 이후로 서산군(瑞山郡)에 이거하였다. 15세 김익호(金益好)ㆍ김익우(金益祐)의 대 이후로는 홍성군(洪城郡)에, 김익순(金益順)의 대 이후로는 보령군(保寧郡)에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17세 이후로는 공주군(公州郡)ㆍ부여군(扶餘郡)ㆍ청양군(靑陽郡)으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한편 11세 사승공(司丞公) 김영전(金永湔)의 아들 김간(金侃)의 대 부터는 공주군(公州郡)에 터를 잡았고,공평공(恭平公) 김영유(金永濡)의 후손은 광주군(廣州郡)에서 세거하면서 일부가 13세 김원필(金元弼)ㆍ김세필(金世弼)ㆍ김홍필(金洪弼)의 대 충주(忠州)에 터를 잡았다.

 

1930년 당시 경주 김씨(金氏)는 경기도 광주(廣州)ㆍ양주(楊州)ㆍ포천(抱川)ㆍ양평(楊平)ㆍ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연천(漣川)ㆍ용인(龍仁)ㆍ안성(安城)ㆍ평택(平澤)ㆍ화성(華城)ㆍ시흥(始興)ㆍ부천(富川),김포(金浦)ㆍ장단(長湍)ㆍ강화(江華)ㆍ옹진군(甕津郡)ㆍ수원시(水原市), 강원도 인제(麟蹄)ㆍ회양(淮陽)ㆍ양양(襄陽)ㆍ고성(高聲)ㆍ삼척(三陟)ㆍ영월(寧越)ㆍ홍천(洪川)ㆍ철원(鐵原)ㆍ춘천(春川)ㆍ금화(金化)ㆍ원주시(原州市) 일원, 충북 청주(淸州)ㆍ청원(淸原)ㆍ보은(報恩)ㆍ옥천(沃川)ㆍ영동(永同)ㆍ진천(鎭川)ㆍ괴산(槐山)ㆍ충주(忠州)ㆍ음성(陰城)ㆍ중원군(中原郡), 충남 공주(公州)ㆍ연기(燕岐)ㆍ대덕(大德)ㆍ부여(附與)ㆍ서천(舒川)ㆍ보령(保寧)ㆍ청양(靑陽)ㆍ홍성(洪城)ㆍ예산(禮山)ㆍ서산(瑞山)ㆍ아산(牙山)ㆍ천원군(天原郡), 전북 장수(長水)ㆍ임실(任實)ㆍ순창(淳昌)ㆍ남원(南原)ㆍ고창(高敞)ㆍ김제(金堤)ㆍ옥구(沃溝)ㆍ익산군(益山郡), 전남 광산(光山)ㆍ곡성(谷城)ㆍ순천(順天)ㆍ승주(昇州)ㆍ보성(寶城)ㆍ화순군(和順郡), 경북 달성(達城)ㆍ군위(軍威)ㆍ의성(義城)ㆍ안동(安東)ㆍ영양(英陽)ㆍ영덕(盈德)ㆍ영일(迎日)ㆍ월성(月城)ㆍ영천(永川)ㆍ경주(慶州)ㆍ경산(慶山)ㆍ고령(高靈)ㆍ상주(尙州)ㆍ 산(善山)ㆍ문경(聞慶)ㆍ영주(榮州), 경남 진양(晉陽)ㆍ의령(宜寧)ㆍ함안(咸安)ㆍ울주(蔚州)ㆍ남해(南海)ㆍ하동(河東)ㆍ함양(咸陽)ㆍ협천군(陜川郡), 제주도 일원, 황해도 평산(平山)ㆍ황주(黃州)ㆍ봉산(鳳山)ㆍ서흥군(瑞興郡), 평남 성천(成川)ㆍ용강(龍岡)ㆍ안주군(安州郡), 평북 의주(義州)ㆍ태주(泰州)ㆍ운산(雲山)ㆍ영변(寧邊)ㆍ박천(博川)ㆍ정주(定州)ㆍ벽동(碧潼)ㆍ자성군(慈城郡), 함남 정평(定平)ㆍ삼수(三水)ㆍ갑산(甲山)ㆍ함주(咸州)ㆍ영흥(永興)ㆍ고원(高原)ㆍ북청(北靑)ㆍ신흥(新興)ㆍ장진군(長津郡), 함북 길주(吉州)ㆍ학성(鶴城)ㆍ경흥(慶興)ㆍ성진(城津)ㆍ무산(茂山)ㆍ회령(會寧)ㆍ종성(鍾城)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특히 월성군(月城郡) 안강읍(安康邑) 노당리(老堂里)에 있는 집성촌의 경우 김처형(金處衡)이세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이 곳에 은신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의 증손 김종일(金宗一)은 사서(司書)로서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있는 청(淸)나라 심양(瀋陽)에 파견되었는데이 곳에서 소현세자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였다가 조선으로 압송, 영덕(盈德)에 유배되었다.

그 후에 풀려나와 울산부사(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마을 중앙에 자리잡은 정산서당(靜山書堂)은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서, 그의 유고가 담긴 ‘노암문집(魯菴文集)’ 등 1백여권의 고서와 목판본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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