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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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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신문왕(神文王 681~692 재위기간 11년) 신문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정명이며[명지의 자는 일조이다.], 문무대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자의[의(儀)를 의(義)로 쓰기도 한다.]왕후이다.

왕비는 김씨이며 소판 흠돌의 딸이다. 왕이 태자였을 때 그녀를 맞았으나 오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였고, 뒤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란에 연좌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문무왕 5년에 태자가 되었으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다.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을 이어 받았다. 원년 8월, 서불한 진복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8일, 소판 김 흠돌·파진찬 흥원·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되었다.

13일, 보덕왕이 사신 소형 수덕개를 보내 역적을 평정한 것을 치하하였다.

16일,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예전 성인들의 좋은 법도이며,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 또한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다. 과인이 못나고 박덕한 몸으로 숭고한 왕업을 이었기에, 식사를 잊고 새벽에 일어나고 밤 늦게 잠을 자면서, 충복 대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였으니, 상중에 서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반란의 괴수 흠돌·흥원·진공 등은 그들의 재능이 훌륭하여 작위에 오른 것이 아니며, 관직도 실은 은전에 의하여 오른 것이었다.

 

그들은 항상 행동을 조심하고 근신하여 부귀를 보전해야 했으나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결국은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행복이나 위세를 마음대로 만들어 관료들을 업신여기고 상하를 기만하였으며, 한없이 탐욕스런 생각을 함부로 내보이고 포학한 마음을 휘둘렀으며, 흉악하고 사악한 자들을 끌어 들이고 궁중의 내시들과 결탁하였다.

 

그 화란이 안팎으로 통하여 악의 무리들이 모여 거사일을 정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과인이 위로 천지의 도움을 받고 아래로 조상의 도움을 받아, 쌓이고 쌓인 흠돌 등의 음모가 탄로되었으니, 이는 곧 사람과 귀신이 모두 취하지 않는 행위요,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 행위이니, 정의를 범하고 기풍에 상처냄이 이보다 더 심한것이 없을 것이다. 이리하여 군사를 모아 흉악한 무리들을 무찌르니 더러는 산골로 도망하고, 혹은 대궐 뜰에 와서 항복하였다.

 

잔당들은 모두 체포하여 이미 처형하였고, 향후 3,4일 사이에 괴수들도 모두 소탕할 것이다.이는 부득이한 조치였으나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여러 백성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백성을 걱정하고 그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었겠는가!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원근에 걱정이 없어졌으므로, 소집하였던 병마를 조속히 돌려 보낼 것이니, 이를 사방에 포고하여 백성들이 알도록 하라!" 28일, 이찬 군관을 목 베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임금을 섬기는 법도는 충성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요,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병부령 이찬 군관은 순서에 따라 마침내 높은 지위에 올랐으나 임금을 정성껏 보좌하지 못하고, 결백한 절조를 조정에 바치지 못하며, 임금의 명령을 받으면 제 몸을 잊어 버릴 줄 모르고, 나라를 위하여 정성을 표할 줄 몰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역신 흠돌 등과 어울리면서 그들이 반역할 것을 알고도 미리 고발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이 없고, 더욱 공공의 질서를 따를 뜻이 없는 것이니, 어찌 다시 재상의 직무를 맡겨 국가의 헌장을 흐리게 할 것인가? 마땅히 일반 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여 후진들에게 경계를 삼게 하리라. 군관과 그의 맏아들 한 명을 자살하여 죽게 하고, 원근에 포고하여 모두가 알도록 하라." 겨울 10월, 시위감을 없애고 장군 6인을 두었다.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를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 위화부령 2인을 두어 관리의 선발과 추천을 맡게 하였다.

 

5월,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

6월,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또한 공장 부감 1인과 채전감 1인을 두었다. 3년 봄 2월, 순지를 중시로 임명하였다. 일길찬 김 흠운의 딸을 부인으로 삼기로 하고, 먼저 이찬 문영과 파진찬 삼광을 보내 기일을 정하고, 대아찬 지상을 보내 납채를 하였는데, 폐백이 열다섯 수레, 쌀·술·기름·꿀·간장·된장·포·식혜가 1백 35수레, 벼가 1백 50수레였다.

 

여름 4월, 평지에 눈이 한 자 쌓였다. 5월 7일, 이찬 문영과 개원을 김 흠운의 집에 보내 그녀를 부인으로 책봉하고, 그 날 묘시에 파진찬 대상·손문과 아찬 좌야·길숙 등으로 하여금 각각 그들의 아내와 딸과 이 밖에 양과 사량 두 부의 여자 각 30명씩을 데리고 가서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부인이 수레에 탔는데 좌우에 시종하는 관원들과 하녀로 따르는 부녀들의 모습이 성대하였다. 왕궁 북문에 이르러 부인이 수레에서 내려 대궐로 들어 왔다.

 

겨울 10월,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려, 서울에 머물게 하였으며, 좋은 집과 좋은 밭을 주었다. 혜성이 오거 성좌에 나타났다. 4년 겨울 10월,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날아 다녔다. 11월, 안승의 조카뻘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잔적들이 대문의 처형을 보고는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한 채 반역하므로, 왕이 장병들에게 명령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 전투 중에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점령하고, 그 지방 사람들을 남쪽의 주와 군에 옮겨 살게 하였으며, 그 곳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대문을 혹은 실복이라고도 한다.]

 

5년 봄, 다시 완산주를 설치하고 용원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를 나누어 청주를 두니, 처음으로 구주가 되었다. 대아찬 복세를 총관으로 삼았다. 3월, 남원 소경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사신으로 삼았다. 남원소경을 두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였다. 봉성사가 낙성되었다. 여름 4월, 망덕사가 낙성되었다. 6년 봄 정월, 이찬 대장[장(莊)을 장(將)으로도 쓴다.]을 중시로 삼았다. 예작부에 경 두 사람을 두었다.

 

2월, 석산·마산·고산·사평의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를 군으로, 웅천군을 주로 만들었다.

발라주를 군으로, 무진군을 주로 만들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예기]와 여러 문장을 요청하니, 측천무후가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길흉요례]을 베껴주고, 또한 [문관사림] 중에서 준칙에 관한 글을 선택하여 50권을 만들어 주었다. 7년 봄 2월, 원자가 출생하였다. 이 날 날씨가 음침하여 어둡고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다. 3월, 일선주를 폐지하고, 다시 사벌주를 두었다. 파진찬 관창을 총관으로 삼았다. 여름 4월, 음성서의 장을 경으로 바꾸었다. 대신을 시켜 종묘에 제사를 지냈다. 제문은 다음과 같았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삼가 태조대왕·진지대왕·문흥대왕·태종대왕·문무대왕 영전에 아뢰나이다.저는 천박한 자질로 숭고한 유업을 이어받아, 자나깨나 걱정하고 노력하여 편안하게 지낼 틈이 없었으나, 종묘의 돌보심과 천지가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락하며, 이역의 내빈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며, 형정이 공평하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근자에 와서 도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왕위에 있다보니,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매,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관 모를 시켜 변변치 못한 제물을 받들어 살아 계신 신령 앞에 드리오니,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사 이 하찮은 몸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해주시며, 5사의 성과를 틀리지 말게 하시며, 농사가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먹고 입을 것이 풍족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중외가 평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에게 넉넉함을 남겨주고,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룁니다."5월, 교서를 내려 문무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밭을 주었다.

 

가을에 사벌과 삽량 두 주의 성을 쌓았다.

8년 봄 정월, 중시 대장(大莊 사람이름)이 죽고 이찬 원사(사람이름)가 중시가 되었다. 2월, 선부에 경 한 사람을 증원하였다. 9년 봄 정월, 왕이 하교하여, 서울과 지방 관리의 녹읍을 폐지하고, 매년 직급에 따라 벼를 주는 것으로 상례를 삼도록 하였다. 가을 윤 9월 26일, 왕이 장산성에 갔다. 서원경성을 쌓았다. 왕이 달구벌로 서울을 옮기려 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0년 봄 2월, 중시 원사가 병으로 사직하자, 아찬 선원으로 중시를 삼았다.겨울 10월, 전야산군을 설치하였다. 11년 봄 3월 1일, 왕자 이홍을 태자로 봉하였다. 13일에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에서 흰 참새를 바쳤다. 남원성을 쌓았다.12년 봄, 대나무가 말랐다. 당 나라 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다. "우리 태종 문황제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던 날 묘호를 태종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 김 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한 후에 대답하였다.

 

"우리 나라 선왕 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러나 생각컨대, 선왕 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 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이제 교칙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사신이 황제에게 복명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기를 삼가 바랍니다."그 후에 다시는 이에 관한 다른 칙명이 없었다.

가을 7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신문이라 하고 낭산 동쪽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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