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자수
  • 오늘125
  • 어제173
  • 최대2,962
  • 전체 61,856

경주김씨 왕계통보

본문

ma01.png 26대 헌덕왕본기

 

 

gjkimyu052.jpg

 

gjkimyu051.jpg

 

<憲德王>立. 諱<彦昇>, <昭聖王>同母弟也. <元聖王>六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 七年, 誅逆臣, 爲 ; 十年爲侍中; 十一年,  以伊 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 卽位. 妃<貴勝>夫人, <禮英>角干女也. 以伊 <金崇斌>爲上大等. 秋八月, 大赦. 遣伊 <金昌南>等, 入<唐>告哀. <憲宗>遣職方員外郞攝御史中丞 <崔廷>, 以其質子<金士信>副之, 持節吊祭, 冊立王爲開府儀同三司檢校太尉持節大都督<?林州>諸軍事兼持節充寧海軍 使上柱國<新羅>王. 冊妻<貞>氏爲妃. 賜大宰相<金崇斌>等三人門戟.[按: 王妃, <禮英>角干女也, 今云<貞>氏, 未詳.]

헌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이름은 언승이며, 소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왕은 이보다 앞서 원성왕 6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작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하는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고, 애장왕 원년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 때에 와서 즉위한 것이다. 왕비는 귀승부인이니 각간 예영의 딸이다. 이찬 김 숭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8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이찬 김 창남 등을 당에 보내 이전 왕의 죽음을 알렸다. 당 헌종은 직방 원외랑섭어사중승 최 정을 정사로, 인질로 가있던 김 사신을 부사로 파견하면서, 황제의 신임표를 지니고 가서 조의를 표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새로운 왕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위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충영해군사 상주국신라왕'으로 책봉하고, 그의 아내 정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으며, 대재상 김 숭빈 등 3명에게 문극을 주었다.

[살펴보면 왕비는 각간 예영의 딸인데, 여기에서는 정씨라고 했으니 확실하지 않다.]

 

二年, 春正月, 以波珍 <亮宗>爲侍中. <河西州>進赤鳥{赤烏} . 二月, 王親祀神宮. 發使修葺國內 防. 秋七月, 流星入紫微. <西原京>進白雉. 冬十月, 遣王子<金憲章>入<唐>, 獻金銀佛像及佛經等, 上言: "爲<順宗>祈福." 流星入王良.

2년 봄 정월, 파진찬 양종을 시중으로 삼았다. 하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2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사람을 보내 국내의 제방을 수리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유성이 자미 성좌에 들어갔다. 서원경에서 흰 꿩을 진상하였다.

겨울 10월, 왕자 김 헌장을 당에 보내, 금은으로 만든 불상과 불경 등을 바치고 아뢰기를 "순종을 위하여 명복을 빈다"고 하였다. 유성이 왕량 성좌에 들어 갔다.

 

三年, 春正月, 侍中<亮宗>以病免, 伊 <元興>爲侍中. 二月, 以伊 <雄元>爲<完山州>都督. 夏四月, 始御<平議殿>聽政.

3년 봄 정월, 시중 양종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원흥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이찬 웅원을 완산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처음으로 평의전에서 정사를 처리하였다.

 

四年春, 以<均貞>爲侍中, 以伊 <忠永>年七十, 賜 杖. 秋九月, 遣級 <崇正>使北國.

4년 봄, 균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이찬 충영이 나이 70세가 되었으므로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가을 9월, 급찬 숭정을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五年, 春正月, 以伊 <憲昌>爲<武珍州>都督. 二月, 謁始祖廟. <玄德門>火.

5년 봄 정월, 이찬 헌창을 무진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현덕문에 불이 났다.

 

六年, 春三月, 宴群臣於<崇禮殿>, 樂極, 王鼓琴, 伊 <忠榮>起舞. 夏五月, 國西大水, 發使撫問經水州郡人民, 復一年租調. 秋八月, 京都風霧如夜. <武珍州>都督<憲昌>, 入爲侍中. 冬十月, <黔牟>大舍妻, 一産三男.

6년 봄 3월, 숭례전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즐거움이 극에 달하자, 왕은 거문고를 연주하고, 이찬 충영은 일어나 춤을 추었다. 여름 5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자를 보내 수재를 당한 주군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1년 간의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였다. 가을 8월, 서울에 바람이 불고 안개가 끼어 낮이 밤과 같았다. 무진주 도독 헌창을 중앙으로 불러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대사 검모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七年, 春正月, 遣使朝<唐>, <憲宗>引見, 宴賜有差. 夏五月, 下雪. 秋八月己亥朔, 日有食之. 西邊州郡大飢, 盜賊蜂起, 出軍討平之. 大星出翼軫間, 指庚, 芒長六許尺, 廣二許寸.

7년 봄 정월, 당에 사신을 보냈다. 헌종이 그를 접견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여름 5월, 눈이 내렸다. 가을 8월 초하루 기해일에 일식이 있었고,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큰 기근이 들어 도적이 봉기하므로 군사를 파견하여 토벌하였다.

큰 별이 익성 성좌와 진성 성좌 사이에 나타나서 서쪽을 향하였다. 그 빛이 길이는 6척 정도였고, 폭은 두 치 가량이었다.

 

八年, 春正月, 侍中<憲昌>出爲<菁州>都督, <璋如>爲侍中. 年荒民飢, 抵<浙東>求食者一百七十人. <漢山州> <唐恩縣{唐恩郡}> 石長十尺, 廣八尺, 高三尺五寸, 自移一百餘步. 夏六月, <望德寺>二塔戰.

8년 봄 정월, 시중 헌창이 외직으로 나가 청주 도독이 되었고, 장여가 시중이 되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고, 절동 지방으로 가서 먹을 것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었다.

한산주 당은현에서 길이 10척, 넓이 8척, 높이 3척 5촌이 되는 큰 바위가 저절로 1백여 보 이동하였다.

여름 6월,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九年, 春正月, 以伊 <金忠恭>爲侍中. 夏五月, 不雨, 遍祈山川, 至秋七月, 乃雨. 冬十月, 人多飢死, 敎州郡發倉 存恤. 遣王子<金張廉>, 入<唐>朝貢.

9년 봄 정월, 이찬 김 충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5월, 비가 내리지 않아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가을 7월이 되자 비가 내렸다.

겨울 10월, 굶어 죽는 사람이 늘어나자, 왕은 주와 군에 교서를 내려, 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왕자 김 장렴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夏六月癸丑朔, 日有食之.

10년 여름 6월 초하루 계축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一年, 春正月, 以伊 <眞元>年七十, 賜 杖. 以伊 <憲貞>病不能行, 年未七十, 賜金飾紫檀杖. 二月, 上大等<金崇斌>卒, 伊 <金秀宗>爲上大等. 三月, 草賊遍起, 命諸州郡都督大守{太守} , 捕捉之. 秋七月, <唐>< 州>節度使<李師道>叛. <憲宗>將欲討平, 詔遣<楊州>節度使<趙恭>, 徵發我兵馬, 王奉 旨, 命順天軍將軍<金雄元>, 率甲兵三萬以助之.

11년 봄 정월, 이찬 진원의 나이가 70세가 되자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이찬 헌정이 병이 나서 걷지 못하므로, 나이 70세가 안되었으나 금으로 장식한 자단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상대등 김 숭빈이 사망하자, 이찬 김 수종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초적들이 도처에서 봉기하였다. 왕은 모든 주와 군의 도독 및 태수에게 명하여 그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가을 7월, 당 나라 운주 절도사 이사도가 반란을 일으켰다. 헌종이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양주절도사 조 공을 보내 우리 병마의 출동을 요구하였다. 왕은 이에 따라 순천군장군 김 웅원으로 하여금 군사 3만을 거느리고가서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二年, 春夏旱, 冬飢. 十一月, 遣使入<唐>朝貢, <穆宗>召見<麟德殿>, 宴賜有差.

12년, 봄과 여름에 가물었다. 겨울에 기근이 들었다.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목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접견 하고, 사신의 등급에 따라 연회를 열어 주고 등급에 따라 하사품을 주었다.

 

十三年, 春, 民饑, 賣子孫自活. 夏四月, 侍中<金忠恭>卒, 伊 <永恭>爲侍中, <菁州>都督<憲昌>, 改爲<熊川州>都督. 秋七月, <浿江><南川>二石戰. 冬十二月二十九日, 大雷.

13년 봄, 백성들이 굶주려 자손을 팔아 연명하는 자가 있었다.

여름 4월, 시중 김 충공이 사망하자 이찬 영공이 시중이 되었다. 청주 도독 헌창이 웅천주 도독이 되었다.

가을 7월, 패강 남천에 있는 두 돌이 서로 맞붙었다.

겨울 12월 29일, 큰 우레가 있었다.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秀宗>或云<秀升>.] 二月, 雪五尺. 樹木枯. 三月, <熊川州>都督 <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

·<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 良>·<浿江>·<北原>

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 <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 ,

<速含郡>大守{太守} , <令忠>位級 ,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 <張雄>先發, <衛恭>·波珍 <悌陵>繼之,

伊 <均貞>· <雄元>·大阿 <祐徵>等, 掌三軍 征. 角干<忠恭>· <允膺>, 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黃山>, <安樂>赴<施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均貞>等與賊戰<星山{黃山}> , 滅之.

諸軍共到<熊津>, 與賊大戰, 斬獲不可勝計. <憲昌>僅以身免, 入城固守. 諸軍圍攻浹旬, 城將陷, <憲昌>知不免, 自死.

從者斷首與身, 各藏. 及城陷, 得其身於古塚, 誅之, 戮宗族黨與凡二百三十九人, 縱其民. 後, 論功爵賞有差. 阿

<祿眞>授位大阿 , 辭不受. 以< 良州><屈自郡>近賊, 不 於亂, 復七年. 先是, <菁州>太守廳事南, 池中有異鳥, 身長五尺,

色黑, 頭如五歲許兒, 喙長一尺五寸, 目如人, 如受五升許器, 三日而死, <憲昌>敗望兆也. 聘角干<忠恭>之女<貞嬌>, 爲太子妃.

<浿江>山谷間, 顚木生蘖, 一夜高十三尺, 圍四尺七寸. 夏四月十三日, 月色如血. 秋七月十二日, 日有黑暈, 指南北. 冬十二月,

遣<柱弼>入<唐>朝貢.

 

14년 봄 정월, 왕의 동복 아우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들어오도록 하였다.[수종을 수승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 도독 헌창은 그의 아버지 주원이 왕이 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반역하여 국호를 장안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 원년이라 하고, 무진·완산·청주·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서원경·금관경의 사신과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협박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상영이 추화군으로 도주하고, 한산주·우두주·삽량주·패강진·북원경 등의  여러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수비하였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 웅과 조아찬 정련의 아들 영충 등이 서울로 도주해와서 변고를 알렸다.

왕은 곧 최 웅에게 급찬의 위와 속함군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장 8명을 파견하여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 웅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잇고, 이찬 균정과 잡찬 웅원과 대아찬 우징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과 잡찬 윤응은 문화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와 안락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무리들과 함께 황산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으로 갔다.

이 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 웅이 적병을 도동현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 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병을 격멸하였다.

균정 등은 성산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여러 군대가 함께 웅진에 도착하여, 적과 크게 싸웠는데 죽이거나 생포한 숫자를 모두 헤아릴 수 없었다. 헌창이 가까스로 몸을 피하여 성으로 들어가 수 비하였다. 모든 군사가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한지 열흘 만에 성이 함락되려 하자, 헌창은 패배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

그의 종자가 머리와 몸을 베어 각각 따로 묻었다. 성이 점령되자 그의 몸을 옛무덤에서 찾아내어 다시 베고, 그의 친족과 도당 239명을 죽이고, 그 백성들은 방면하였다. 후에 전공을 논하여 정도에 따라 작위를 상으로 주었다.

아찬 녹진에게는 대아찬의 작위를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삽량주의 굴자군은 적지와 근접한 곳에 있었으나 반란에 동참하지 않았으므로 7년 동안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이에 앞서 청주 태수의 청사 남쪽 연못에 이상한 새가 있었다. 그 키는 다섯 자였으며, 빛깔이 검고, 머리는 다섯 살 정도의 아이의 머리 크기만 하고, 부리의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으며, 눈은 사람의 눈과 흡사하고, 위장은 닷되들이 그릇 정도였는데, 사흘 만에 죽었다. 이는 헌창이 패망 할 징조였다. 각간 충공의 딸 정교를 태자비로 맞았다.

패강 산골짜기의 쓰러진 나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그 싹은 하룻밤에 높이가 열 세 자, 둘레가 넉 자 일곱 치나 자랐다.

여름 4월 13일, 달빛이 핏빛 같았다.

가을 7월 12일, 해에 흑점이 생겨 남북을 가리켰다.

겨울 12월, 주필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五日, <西原京>有蟲, 從天而墮. 九日有白·黑·赤三種蟲, 冒雪能行, 見陽而止. <元順>·<平原>二角干, 七十告老, 賜 杖. 二月, 合<水城郡>·<唐恩縣{唐恩郡}> . 夏四月十二日, 流星起天市, 犯帝座, 過天市東北垣·織女·王良至閣道, 分爲三, 聲如擊鼓而滅. 秋七月, 雪.

15년 봄 정월 5일, 서원경에, 하늘에서 벌레가 떨어졌다.

9일에는 흰 색·검은 색·붉은 색의 세 가지 벌레가 눈밭을 기어 다니다가 햇볕이 나자 사라졌다.

원순·평원 두 각간이 나이 70세가 되어 은퇴하고자 하였다. 왕은 그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하였다.

2월, 수성군과 당은현을 합쳤다. 여름 4월 12일, 유성이 천시 성좌에서 나와 제좌를 범하고, 천시 성좌 동북쪽의 원 성좌, 직녀 성좌, 왕량 성좌를 지나 각도성에 이르러 셋으로 나뉘었는데, 북치는 소리를 내면서 사라졌다.

가을 7월, 눈이 내렸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北漢山城}>  . 都督<聰明>率兵, 捕殺之.[<平壤>, 今<楊州>也, <太祖>製<庄義寺>齋文, 有<高麗>舊壤, <平壤>名山之句.] 三月, <武珍州><馬彌知縣>女人産兒, 二頭二身四臂, 産時天大雷. 夏五月, 遣王子<金昕>, 入<唐>朝貢, 遂奏言: "先在大學生, <崔利貞>·<金叔貞>·<朴季業>等, 請放還蕃, 其新赴朝<金允夫>·<金立之>·<朴亮之>等一十二人, 請留宿衛. 仍請配國子監習業, 鴻 寺給資粮." 從之. 秋, < 良州>獻白烏{白馬} . <牛頭州><大楊管郡><黃知>奈麻妻, 一産二男二女, 賜租一百石.

17년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이 고달산의 적 수신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였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우기 위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해왔다.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처형하였다.[평양은 지금의 양주인데, 태조가 지은 장의사 재문에 '고려의 옛 땅이요, 평양 명산'이라는 글귀가 있다.] 3월, 무진주 마미지현에 사는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머리가 둘, 몸이 둘, 팔이 넷이었다. 이 아이를 낳을 때, 천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여름 5월, 왕자 김 흔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황제에게 말했다. "이전에 와있는 대학생 최 이정·김 숙정·박 계업 등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고, 새로 입조한 김 윤부·김 입지·박 양지 등 열 두명을 숙위로 머물도록 해주소서. 그리고 그들을 국자감에 배치하여 공부를 하게 하고, 홍려시에서 물자와 식량을 공급하여 주소서."

황제가 이를 따랐다. 가을에 삽량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우두주 대양관군에 사는 내마 황지의 아내가 아들 둘과 딸 둘을 한 번에 낳았다. 그 녀에게 벼 1백 석을 주었다.

 

十八年, 秋七月, 命<牛岑>太守<白永>, 徵<漢山>北諸州郡人一萬, 築<浿江>長城三百里. 冬十月, 王薨. 諡曰<憲德>, 葬于<泉林寺>北.[『古記』云: "在位十八年, <寶曆>二年丙午四月卒." 『新唐書』云: "<長慶><寶曆>間, <羅>王<彦昇>卒. " 而『資治通鑑』及『舊唐書』皆云: "<大和>五年卒." 豈其誤耶.]

18년 가을 7월, 우잠 태수 백영으로 하여금 한산 북쪽의 여러 주와 군에서 1만 명을 징발하여, 패강에 장성 300리를 쌓게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덕이라 하고, 천림사 북쪽에 장사지냈다.[고기에는 '재위 18년 보력 2년 병오 4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장경 보력 연간에 신라왕 언승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치통감]과 [구당서]에는 모두 태화 5년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목록으로 돌아가기  bt09.png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