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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본문

ma01.png 36대 진성왕본기

 

 

<眞聖王>立. 諱<曼>, <憲康王>之女弟也.[『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 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 爲太師, 亡兄臣<晸>爲大傅{太傅} ." 又納旌節表云: "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 生未周 , 臣仲兄<晃>權統藩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 本紀則云<膺廉>, <眞聖王>諱<坦>, 本紀則云<曼>, 又<定康王><晃>以<光啓>三年薨, 本紀謂二年薨, 皆不知孰是.] 大赦, 復諸州郡一年租稅. 設百(+高) 座 <皇龍寺>, 親幸聽法. 冬無雪.

진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만이며, 헌강왕의 누이 동생이다.[최 치원 문집 제2권 사추증표에는 "신하 탄은 말합니다. 삼가 하명을 받들어 저의 죽은 아비 응을 태사로 추증하고, 죽은 형인 정을 태부로 추증하였습니다"라고 되어 있으며, 또한 납정절표에는 "저의 맏형인 국왕 정이 지난 광계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나, 저의 조카 요는 태어난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았으므로, 저의 둘째 형인 황이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다가, 또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보면 경문왕의 이름이 응인데, 본기에는 응렴이라 하였고, 진성왕의 이름이 탄인데, 본기에는 만이라 하였으며, 또한 정강왕 황은 광계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모두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모든 주와 군의 1년간의 조세를 면제하였다. 황룡사에 백고좌를 열고 왕이 직접 가서 설법을 들었다. 겨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少梁里>石自行. 王素與角干<魏弘>通, 至是, 常入內用事. 仍命與<大矩>和尙, 修集鄕歌, 謂之三代目云. 及<魏弘>卒, 追諡爲<惠成大王>. 此後, 潛引少年美丈夫兩三人淫亂, 仍授其人以要職, 委以國政. 由是,倖肆志, 貨賂公行, 賞罰不公, 紀綱壞弛. 時有無名子, 欺謗時政, 構辭榜於朝路. 王命人搜索, 不能得. 或告王曰: "此必文人不得志者所爲, 殆是<大耶州>隱者<巨仁>耶?" 王命拘<巨仁>京獄, 將刑之. <巨仁>憤怨, 書於獄壁曰: "<于公>慟哭三年旱, <鄒衍>含悲五月霜. 今我幽愁還似古, 皇天無語但蒼蒼. " 其夕, 忽雲霧震雷雨雹, 王懼, 出<巨仁>放歸. 三月戊戌朔, 日有食之. 王不豫, 錄囚徒, 赦殊死已下,  許度僧六十人. 王疾乃 . 夏五月, 旱.

2년 봄 2월, 소양리에서 돌이 저절로 움직였다. 왕이 원래부터 각간 위 홍과 간통하고 있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궁중에 들어 와서 일을 보게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여 대구 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게 하였는데, 이를 삼대목이라고 불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이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이후로 왕은 젊은 미남자 두 세 명을 남몰래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나라 정사를 맡겼다. 이에 따라 아첨하고 총애를 받는 자들이 방자하여지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벌이 공평하지 못하고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 때 누군가가 이름을 감추고 시정을 비방하는 말을 만들어 관청 거리에 방을 붙였다. 왕이 그를 수색케 하였으나 잡을 수 없었다.

누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필시 문인으로서 뜻을 펴지 못한 자의 소행이니, 아마도 대야주에 숨어 사는 거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려 거인을 체포하여 서울 감옥에 가두고 처벌하려 하였는데, 거인이 분하고 원망스러워, 감옥 벽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우공이 통곡하니 3년이나 가물었고,추연이 슬퍼하니 5월에도 서리 왔네. 지금 나의 깊은 시름, 옛 일과 같건만하늘은 말없이 푸를 뿐인가.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덮이고 번개가 치며 우박이 내렸다. 왕이 이를 두려워하여 거인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들어 편치 못하자, 죄수들을 조사하여 사형수 이하의 죄수를 석방하고, 중 6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왕의 병이 곧 나았다. 여름 5월, 가뭄이 들었다.

 

三年, 國內諸州郡, 不輸貢賦, 府庫虛竭, 國用窮乏, 王發使督促. 由是, 所在盜賊蜂起.於是,<元宗>·<哀奴>等據<沙伐州>叛. 王命奈麻<令奇>捕捉. <令奇>望賊壘, 畏不能進, 村主<祐連>, 力戰死之. 王下 斬<令奇>, <祐連>子年十餘歲, 嗣爲村主.

3년,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납세를 하지 않아 창고가 비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독촉하였다. 이로 인하여 도처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다. 이 때 원종·애노 등이 사벌주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내마 영기에게 명령하여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으나, 영기가 반도의 보루를 보고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못하자, 촌주 우연이 최선을 다하여 싸우다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참수하고, 나이가 10여 세인 우연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日暈五重. 十五日, 幸<皇龍寺>, 看燈.

4년 봄 정월,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나타났다.

15일,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연등 행사를 구경하였다.

 

五年, 冬十月, <北原>賊帥<梁吉>, 遣其佐<弓裔>, 領百餘騎, 襲<北原>東部落及<溟州>管內<酒泉>等十餘郡縣.

5년 겨울 10월, 북원의 도적 두목 양길이 그의 부하 궁예로 하여금 기병 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 동쪽 부락과 명주  관내 주천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게 하였다.

 

六年, <完山>賊<甄萱>據州, 自稱<後百濟>, <武州>東南郡縣降屬.

6년, 완산의 도적 견훤이 주에 웅거하여 후백제라고 자칭하였다. 무주 동남쪽의 군현이 그에게 투항하였다.

 

七年, 遣兵部侍郞<金處誨>, 如<唐>納旌節, 沒於海.

7년, 병부 시랑 김 처회를 당 나라에 보내 정절을 바치게 했는데, 그는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春二月, <崔致遠>進時務一十餘條, 王嘉納之, 拜<致遠>爲阿 . 冬十月, <弓裔>自<北原>入<何瑟羅>, 衆至六百餘人,自稱將軍.

8년 봄 2월, 최 치원이 시국에 관한 의견 십여 조목을 작성하여 바쳤다. 왕이 이를 기쁘게 받아 들이고, 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겨울 10월, 궁예가 북원으로부터 하슬라에 들어오니, 따르는 무리가 6백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장군이라고 자칭하였다.

 

九年, 秋八月, <弓裔>擊取<猪是{猪足}> ·< 川>二郡, 又破<漢州>管內<夫若>·<鐵圓>等十餘郡縣. 冬十月, 立<憲康王>庶子<嶢>爲太子. 初, <憲康王>觀獵, 行道傍見一女子, 姿質佳麗. 王心愛之, 命後車載, 到 宮野合, 卽有娠而生子. 及長, 體貌魁傑, 名曰<嶢>. <眞聖>聞之, 喚入內, 以手撫其背曰: "孤之兄第{弟} 姉妹, 骨法異於人, 此兒, 背上兩骨隆起, 眞<憲康王>之子也." 仍命有司, 備禮封崇.

9년 가을 8월, 궁예가 저족·성천의 두 군을 탈취하고, 또한 한주 관내의 부약·철원 등 10여 군현을 격파하였다. 겨울 10월, 헌강왕의 서자 요를 태자로 삼았다. 처음에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하다가, 길 옆에서 한 여인을 보았는데, 그녀의 자태가 아름다웠다. 왕이 마음 속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뒷수레에 태우고, 행재소에 와서 야합하였는데, 바로 임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그가 장성하자 체격이 크고 용모가 걸출하므로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 진성왕이 이 말을 듣고 그를 궁에 불러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나의 형제 자매의 골격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데, 이 아이는 등에 두 뼈가 솟아 있으니, 정말 헌강왕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고, 곧 관리에게 명하여 예를 갖추어 높이 봉하였다.

 

十年, 賊起國西南, 赤其袴以自異, 人謂之<赤袴賊>. 屠害州縣, 至京西部<牟梁里>, 劫掠人家而去.

10년, 도적들이 서남쪽에서 봉기하였다.

그들은 바지를 붉게 물들여 남들과 구별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주와 현을 도륙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까지 와서 인가를 위협하고 약탈하여 돌아갔다.

 

十一年, 夏六月, 王謂左右曰: "近年以來, 百姓困窮, 盜賊蜂起, 此, 孤之不德也. 避賢讓位, 吾意決矣." 禪位於太子 <嶢>. 於是, 遣使入<唐>表奏曰: "臣某言, 居羲仲之官, 非臣素分; 守<延陵>之節, 是臣良圖. 以臣姪男<嶢>, 是臣亡兄<晸>息. 年將志學, 器可興宗, 不假外求, 爰從內擧, 近已殺權藩寄, 用靖國災." 冬十二月乙巳, 王薨於北宮, 諡曰眞聖, 葬于<黃山>. 三國史記卷第十一.

11년 여름 6월, 왕이 측근들에게 "근년 이래로 백성의 생활이 곤궁해지고 도적들이 봉기하니, 이는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이다. 숨어 있는 어진 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이 결정 되었노라"라고 말하고, 왕위를 태자 요에게 선양하였다. 이에 당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했다.

"신하 아무게는 아룁니다. 희중의 관직에 처하는 것이 저의 본분이 아니며, 연릉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좋은 방도입니다. 저의 조카 요는 죽은 형 정의 아들입니다. 그는 나이가 열댓 살이 되었고, 종실을 흥성케할 자질이 있기에, 인재를 밖에서 구하지 않고 안에서 선택하여, 근일에 이미 나라 일을 임시로 맡겨 국가의 재난을 안정시키게 하고 있습니다."겨울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이라 하고 황산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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