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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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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9대 진흥왕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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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이 왕위에 올랐다.(서기 504년) 왕의 이름은 맥종이라고도 한다. 때에 나이 7세였다.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었다. 그 어머니는 김씨로 법흥왕의 딸이며,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이었다.

그러나 왕은 나이 어려서 왕위에 올랐으므로 왕태후가 섭정으로 나라의 정치를 돌보았다.

 

진흥왕 원년(서기 540) : 8월에 왕은 죄인들을 크게 사면하고 문무관의 관직과 작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10월에 지진이 일어났으며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진흥왕 2년(서기 541) : 3월에 눈이 한 자나 쌓였다. 이사부를 병부령으로 삼아 내외 병마사의 일을 맡게 했다.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매 왕을 이를 허락했다.

 

진흥왕 5년(서기 544) : 2월에 홍륜사가 이룩되었다. 3월에 왕은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니가 되어 부처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진흥왕 6년(서기 545) : 7월에 이찬 이사부가 왕에게 아뢰기를 “국사라는 것은 군신의 선악을 기록하여 잘하고 잘못한 일을 만대에 보이는 것이 온데, 사기를 수찬해 놓지 않으면 후세에 어떻게 사실을 알 수 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왕도 그 말이 옳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 등에게 명하여 문사들을 모아 국사를 수찬하게 했다.

 

진흥왕 9년(서기 548) : 2월에 고구려가 예인들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독산성(충주)을 공격했다. 위급해진 백제가 구원병을 청하니 왕은 장군 주령을 보냈다. 그는 날쌘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달려가서 이들을 치고 백제를 구했다.

 

진흥왕 10년(서기 549) : 봄에 양나라에서 사신과 함께 신라의 입학승 각덕을 통하여 불사리를 보내왔으므로 왕은 문무 백관으로 하여금 홍륜사 앞길까지 나가서 이를 봉영하게 했다.

 

진흥왕 11년(서기 550) : 정월에 백제가 고구려의 도살성을 빼앗으니 3월에 고구려는 백제의 금현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왕은 두 나라가 싸움에 지친 기회를 타서 이찬 이사부에게 명하여 양국을 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두 성을 공략하여 성을 증축하고 1천 명의 군사를 주둔시켜 지키게 했다.

 

진흥왕 12년(서기 551) : 정월에 연호를 고쳐 ‘개국’이라 했다. 3월에 왕은 국내를 순행하다가 낭성에 이르러 우륵과 그의 제자 니문이 음악에 빼어난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고, 특히 그들을 가까이 불러 하림궁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들에게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우륵과 니문은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 가실왕은 십이현금을 12월의 율려를 본떠 만들어 우륵으로 하여금 그 가락을 짓게 했다. 그러나 그 나라가 어지러웠졌으므로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로 왔는데, 그 악기 이름은 가야금이라 했다. 왕은 거칠부 등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치겠 했는데, 그는 대승을 거두어 10군을 공격하여 그 고을을 차지했다.

 

진흥왕 13년(서기 552) : 왕은 계고, 법지, 만적 세 사람에게 명하여 우륵에게 음악을 배우게 했다. 우륵은 각자의 재능에 따라서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가르치고,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수업을 마치자 왕은 그들에게 그들이 배운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말하기를 “앞서 낭성에서 듣던 음악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하면서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진흥왕 14년(서기 553) : 2월에 왕은 소사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로 궁전을 지었는데, 황룡이 그곳에 나타나므로 왕은 이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여 이 궁전을 절간으로 개축하여 황룡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7월에 백제의 동북 변두리를 공격하여 신주(경기도 광주)를 설치하여 아찬 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10월에 왕은 백제의 왕녀를 아내로 맞아서 소비로 삼았다.

 

진흥왕 15년(서기 554) : 7월에 명활성을 수축했다. 이때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 등과 함께 관산성을 공격해 왔다. 관산성의 군주 각각 우덕, 이찬 탐지 등이 적을 맞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신주 군주 무력은 주병을 이끌고 나아가서 매우 고전을 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우도도가 급히 적을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마침내 적을 격파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는데, 좌평 4명과 사졸 2만 9천 6백 명을 참살하니 적은 살아서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삼년산성은 지금의 보은이다.

 

진흥왕 16년(서기 555) : 정월에 비사벌(창녕)에 완산주(전주)를 설치했다.

-10월에 왕은 북한산에 행차하여 국토를 측정했다.

-11월에 왕은 북한산으로부터 왕궁으로 돌아왔는데 지나는 길의 연도의 각 주, 군에 분부하여 1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고 죄수들을 특별히 사면하여 두 가지 죄목 죄수 외에는 모두 풀어 주었다.

 

진흥왕 17년(서기 556) : 7월에 비열홀주(안변)를 설치하고 사찬 성종을 군주로 임명했다.

 

진흥왕 18년(서기 557) : 국원(충주)을 소경으로 만들었다. 사벌주(상주)를 폐하고 감문주(김천)를 설치하여 사찬 기종을 그 군주로 삼았다. 신주를 폐하고 북한산주를 설치했다.

 

진흥왕 19년(서기 558) : 2월에 귀족들의 자제와 육부의 부유한 백성들을 소경인 국원으로 옮겨 살게 했다. 이때 나마 신득이 포와 노를 만들어 왕에게 바쳤는데, 이것을 성 위에 비치하게 했다.

 

진흥왕 23년(서기 562) : 7월에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국경 지대를 침공하여 많은 민가를 노략질했다. 왕은 군사를 이끌고 몸소 출전하여 적을 막아 치고 1천여 명을 베었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니 왕은 이사부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하게 하고 사다함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이때에 사다함은 5천 기를 거느리고 앞서서 진격하여 전단문으로 들어가서 백기를 세워놓자 성중에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다가가서 공격하니 모두 항복하고 말았다. 가야의 반란을 평정하고 그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사다함이 가장 공이 컸던 모양이다. 그에게 양전과 포로 2백 구를 하사했으나 사다함은 한사코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왕은 거의 강제적으로 시상을 감행하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그것을 받아서는 포로들은 모두 놓아 주어 양민으로 만들고 논과 밭은 모두 싸움에 공이 큰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미덕을 칭송했다.

 

진흥왕 25년(서기 564) : 왕은 북제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진흥왕 26년(서기 565) : 왕은 북제의 무성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을 ‘사지절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을 삼았다.

-8월에 왕은 아찬 춘부로 국원으로 나아가서 이를 지키게 했다.

-9월에 완산주를 폐하고 대야주를 설치했다. 이때 진나라에서 사신 유사와 승려 명관을 보내어 국교를 트고 불교의 경론 1천 7백여 권을 함께 보내왔다. 대야주는 지금의 합천을 말한다.

 

진흥왕 27년(서기 566) : 2월에 지원사, 실제사의 두 사원이 준공되었다. 왕자 동륜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이 때 황룡사의 건축이 완료되었다. 황룡사는 신라에서도 이름 높은 절이 되었다.

 

진흥왕 28년(서기 567) : 3월에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진흥왕 29년(서기 568) : 연호를 대창이라 고쳤다.-6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10월에 북한산주(광주)를 폐하고 남천주(이천)를 설치했으며, 또 비열홀주(안변)를 폐하고 달홀주(고성)를 설치했다.

 

진흥왕 31년(서기 570) : 6월에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진흥왕 33년(서기 572) : 정월에 연호를 홍제라 고쳤다.

-3월에 왕태자 동륜이 죽었다. 이때 사신을 북제에 보내어 조공했다.

-10월 20일에 싸움터에서 죽은 군사들을 위하여 팔관연회를 외사에서 베풀었는데, 7일 만에 끝이 났다. 팔관연회는 중요한 불교의 의식이다.

 

진흥왕 35년(서기 574) : 3월에 황룡사의 장륙상을 만들었는데, 구리 3만 5천 7근과 도금 1만 198푼의 중량이 들었다. 장륙상은 이후 신라 삼보의 하나가 되었다.

 

진흥왕 36년(서기 575) : 봄과 여름에 걸쳐 가뭄이 계속되었다. 황룡사의 장륙상에 눈물이 나서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

 

진흥왕 37년(서기 576) :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받들었다. 이보다 앞서 많은 신하들이 인재의 됨됨이를 알지 못하여 근심한 끝에 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 놀게 하여 그들의 행실을 살펴 등용하려고 했다. 그런 끝에 용모가 뛰어난 두 여자를 뽑았다. 하나는 남모, 하나는 준정이라 했다.

그들은 그 무리를 3백여 명이나 모았는데, 두 여자는 그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시새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준정은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독한 술을 먹여 정신을 잃게 한 다음 그녀를 끌어내어 강물에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이 발각되어 준정은 처형을 당하고 함께 모였던 무리들은 각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에 다시 아름다운 남자들을 가려 뽑아서 곱게 단장하여 ‘화랑’이라 이름을 붙여 받들게 했다.

온 나라에서 구름같이 그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그들은 서로 도의를 닦고, 혹은 음률을 즐기면서 아름다운 산수를 찾아 다녔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그들이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의 됨됨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조정에 추천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말하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나오게 되고, 뛰어난 장사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했다.

 

또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는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다. 이것을 풍류라 하는데, 이 가르침을 설치한 근원은 [선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참으로 이것은 삼교를 두루 내포한 것이며, [모사]에 상세히 실려 있거니와 참으로 이것은 삼교를 두루 내포한 것이며, 모든 민중과 접촉하여 교화했다.또한 그들은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와서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취지이며, 또한 모든 일을 서슴없이 처리하고 말없이 일을 실천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가 말한 종지였다. 또한 악한 일을 하지 않고 모든 착한 행실만 믿고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의 교화라 했다.

 

”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는 말하기를 귀인의 몸가짐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가려 뽑아서 분을 바르고 곱게 치장하여 화랑이라 이름하고 나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섬겼다.”고 했다.

이때 안흥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연구하다가 그곳의 중 비마라 등 두 승려와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은 능가승만경과 불사리를 왕에게 바쳤다.

 

-8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열심히 불교를 믿었으며, 그 말년에는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쳤는데, 스스로 법운이라 자칭하며 그 평생을 마치었다.왕비도 또한 이를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서 지내다가 돌아가셨는데, 온 백성들은 예를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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