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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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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1대 미추왕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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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미추인데 시법(諡法)이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이름을 인하여 칭호를 삼았으니,요를 요라 하고 순을 순이라고 함과 같다. 그 선조는 알지이니 알지가 세한을 낳고 세한이 아도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유를 낳고 수유는 욱보를 낳았으며 욱보는 구도를 낳고 구도는 미추를 낳았다. 어머니는 박씨이니 갈문왕 이칠의 따님이다.

비는 광명부인 석씨이니 조비왕의 따님이다.

점해가 훙(薨)하고 아들이 없으매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임금을 삼았으니, 이는 김씨가 국왕이 된 시초이다.

 

임오 원년 12월에 즉위하여 금성에 도읍을 정하였다.

금성은 경주부의 남쪽사리(四里)에 있으니, 시조왕41년에 축성한 바 아직도 남아 있음. (궁궐은 낭산으로서 주산을 삼고 선도산(仙桃山)으로서 안산을 삼았음). 3월에 궁궐 동쪽 연못에서 용이 나타났다.

 

2년 봄 2월에 국조(박혁거세)의 사당에 친히 제향을 올리고 대사(大赦)하였으며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를 추봉하여 갈문왕을 삼았다. (갈문왕으로 추존함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함).

 

3년 정월에 동쪽으로 순행하여 해남을 바라보았고 황산 양산에 순행하여 고령자 및 극빈자를 찾아 구휼하였다.

 

7년에 여러 신하를 남당에 회합시켜 정사와 형벌의 득실을 친히 묻고 또 사신을 보내어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순문(巡問)하게 하였다.

 

11년에 영을 내려 무릇 농사에 방해되는 일은 일체 제거하게 되었다.

 

15년 2월에 신료들이 궁실의 개축을 청하거늘 임금께서 백성의 수거로움을 중난하게 여겨 쫓지 않았다.

 

19년에 한발이 심하거늘 죄수의 원굴(寃屈)한 정상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다.

 

20년 2월에 사당에 참배하고 양산에 서쪽에서 군사를 크게 사열하였다.

 

23년 2월에 국내의 여러 성을 순무하고 10월에 임금이 훙하시거늘 대릉에 장례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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