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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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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01.png 10대 진지왕(眞智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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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대왕릉비(眞智大王陵碑)

 

생존기간 : (?∼579)

재위기간 : (576∼579)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아들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왕위에 올랐으며 무열왕계(武烈王系)의 시조가 되었다.

당시의 왕위계승에 있어서는 이미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있었으므로, 진흥왕의 적손(嫡孫), 즉 동륜태자의 아들인 백정(白淨:뒤의 진평왕)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계승에 다소 문제점이 있었다. 또한 진지왕이 즉위하던 해(576)에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하여 국정을 맡긴 사실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어, 거칠부등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재위 2년인 577년에 서쪽 변경의 주군(州郡)으로 침입하여온 백제군을 일선군(一善郡:지금의 선산) 북쪽에서 격파하여 3,700여명을 참획하는 전과를 올리는 전과를 올렸지만. 내리서성으로 통하는 길은 2년 뒤에 백제가 웅현성(熊峴城:지금의 보은군내로 비정)과 송술성(松述城)을 쌓음으로써 막히고 말았다.

이렇듯 불안정하게 왕위를 계승한 진지왕은, 백제와의 전투에서 결과적으로 패함으로써 더욱더 왕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비록 삼국사기에는 진지왕에 대해 단순사망사실만을 기록하였지만, 삼국유사에는 재위 4년만에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왕위행동이 매우 음란하여 나라사람들이 폐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여기서 나라사람이라는 신라 정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 즉 화백제도에 의한 폐위를 뜻한다.또 화백제도는 만장일치제로, 겉으로 보기에는 귀족들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가중대사를 합리적인 절차로 결정하는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특정 귀족세력이나 왕족세력에 의해 좌우지 되는 독재적 결정방식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서로 다른의견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은 제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폐위되자마자 진지왕은 사망하고 말았다. "폐위되어 죽다"란 삼국유사의 기록은 진지왕의 사인이 단순한 자연사가 아님을 암시한다. 또한 진지왕은 사망하기 직전 도화부인을 희롱한 사건은 삼국유사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마 이것역시 왕위폐위에 한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 신라의 정서상, 국왕의 신분으로 유부녀를 희롱했다는 정도만으로는 폐위의 구실이 다소 약하다. 그렇다면 도화녀와 비형랑의 설화를 바탕으로 당시상황을 재구성해 보자.

 

진지왕은 즉위 초부터 거칠부에게 국정을 일임하는등 정치에는 관심없었고, 당시로서도 문제가 될만큼 진지왕의 음란행위는 다소 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서량부에 사는 한여인이 마치 복숭아 꽃처럼 아름답다하여 사람들은 도화(桃花)녀라 불렀고, 그런 소문은 진지왕이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에 진지왕은 궁궐로 불러들여 간통하여 하였지만, 도화녀는 여자가 키켜야 할 바는 두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이라며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왕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결국 진지왕은 도화녀를 보내주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진지왕은 그 해에 폐위되어 죽고 도화녀의 남편은 3년 후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도화녀의 사망 후 10일 만에 밤중에 진지왕이 살아있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 7일동안 기거한 끝에 도화녀는 임신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도화녀는 사내아이를 출산하여 그의 이름을 비형이라고 지었다.하지만 의아한 것은 진평대왕이 비형랑의 이야기를 듣고 궁중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비형랑은 죽은자의 영혼과 살아있는 여인 사이에서 잉태되어 낳은 사람답게 귀신을 호령하며, 길달이라는 정체불명의 사람을 천거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진평대왕은 신혼조차 확인할 수 없고 심지어는 귀신의 무리중 한명이라고 까지 전해지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요괴에 다름없는 인물에게 집사직을 제수하였다.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길달은 여우로 둔갑하여 도망하였고, 비형랑은 그를 잡아 죽이게 된다. 아무튼 신라사람들에게는 이후 귀신을 쫓을 때 비형랑에 관한 노래를 지어 부르는 등 신격화시켜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노래는 다음과 같다. "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으니 비형랑의 집이로세. 날뛰는 귀신들아, 이곳에 머무르지 말아라." 노래의 내용을 보면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하였다던 진지왕을 성스러운 임금으로 추앙한 것이다.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사람이 혼과 만나 잉태하였다는 것은, 그야말로 판타지의 영역에 속한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이 비형랑이란 인물의 아버지는 바로 진평왕이라고 생각된다. 더구나 진평왕은 진지왕의 조카이니까 닮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비형랑의 아버지가 방문하였을 때는 밤중이었다. 그러니 충분히 동일인물로 착각 할 수 있다. 더구나 남편이 죽인 지 10일만에 도화녀와 사사로운 관계를 맺었으므로, 비록 사망하였지만 살아있을 때 이미 유명한 스켄들의 주인공이였기에, 진지왕에게 모든 허물을 돌리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사생아에 불구한 비형랑을 궁중으로 부른일이나, 비형랑이 추천한 인물을 곧바로 등용한 점 역시 진평왕의 아들임을 예상케 하는 기록이다.

어쩌면 이미 진지왕이 살아있을 때 부터 진평왕 역시 도화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사사롭게는 숙부와 조카사이었던 둘이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었고, 진지왕의 다소 석연치 않은 사망뒷면에 진평왕의 묵시적인 동의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진지왕의 사망과 비형랑의 판타지스러운 출생은, 역사의 됫면에 숨겨져 있는 또하나의 사건을 재조명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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