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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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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565?~서기632

신라김씨11대 왕(579~632 재위).

 

진평왕릉 /신라진평왕릉, 사적 제180호, 경북 ...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銅輪)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딸인 만호부인 김씨(萬呼夫人金氏:또는 萬內夫人金氏)이다. 선비(先妃)는 복승갈문왕(福勝葛文王)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金氏)이고, 후비(後妃)는 승만부인 손씨(僧滿夫人孫氏)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신체가 장대했으며 의지가 굳고 식견이 명철했다고 한다. 진평왕은 진흥왕에 이어 왕권을 성장시켜갔는데 이는 관제의 정비로 나타났다.

579년(진평왕 1)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이듬해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兵部令)에 임명하여 군사권을 장악하게 했다.

581년에는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했다.

583년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다음해 조부령(調府令)을 두어 공부(貢賦)에 관한 일과 승부령(乘府令)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586년에는 예부령(禮部令)을 두었다.

 

588년 노리부가 죽자 이찬 수을부(首乙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591년에 영객부령(領客府令)을 두었다. 그뒤 622년 궁정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했으며 623년 병부에 대감 2명, 624년 시위부(侍衛府)에 대감 6명을 두었다. 한편 불교 진흥에도 힘써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 중국에 가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이들을 지원하여 불사(佛事)뿐만 아니라 국사에도 참여하도록 해 호국불교의 확립에 기여했다. 한편 재위기간 동안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되어 전쟁이 빈발했다.

 

602년 백제가 아막성(阿莫城)을 공격해와 이를 막았으며, 이듬해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입하자 직접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다. 608년에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입해 8,000명을 잡아갔으며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611년 백제군이 쳐들어와 가잠성(椵岑城)을 함락시켰으며, 616년에는 모산성(母山城)을 공격해왔다.

 

629년 대장군 김용춘(金龍春)·김서현(金舒玄)과 부장군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도록 하여 크게 이겼다.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594년 수(隋) 문제로부터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上開府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으며, 608년 원광에게 수나라에 청병하는 글을 짓게 하고, 611년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의 허락을 받았다.

 

624년 당(唐) 고조로부터 주국 낙랑군공 신라왕(柱國樂浪郡公新羅王)에 봉해졌다. 632년에 죽자 한지(漢只)에 장사 지냈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에 추증되었다.

 

2. 마야부인

 

진평왕의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 동륜이었습니다. 진평왕의 부인 마야부인 김씨는 갈문왕 복승의 딸이었습니다.다만 불교를 숭상하기 위해 진평왕의 이름은 백정으로 석가의 아버지 이름과 같고 그리고 왕비의 이름도 석가의 어머니 이름인 마야부인입니다. 이에 의하면 진평왕과 왕비 사이에서 낳은 아들은 석가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다만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이 딸만 있었으며 따라서 석가에 비길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진평왕 다음에 즉위한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써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생각이 깔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내용.

<眞平王>立. 諱<白淨>, <眞興王>太子<銅輪>之子也. 母<金>氏<萬呼>[一云<萬內>.]夫人, 葛文王<立宗>之女, 妃<金>氏<摩耶>夫人, 葛文王<福勝>之女. 王生有奇相, 身體長大, 志識沈毅明達.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그의 이름은 백정이며, 진흥왕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만내라고도 한다.]부인이며, 갈문왕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이며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다.그는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삼국사기에는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마야부인의 아버지는 갈문왕복승 인데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갈문왕(葛文王)이란 명칭은 정식 왕이 아니고 혈통을 달리하여 왕위를 이은 왕의 생부나 왕의 장인 등에게 추봉하던 것으로 조선시대의 대원군.부원군과 같은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왕의 생부나 장인이 모두 갈문왕으로 추봉된 것은 아닌 듯하며, 28대 진덕여왕 이후 갈문왕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습니다.

 

3. 덕만공주와 천명공주

삼국사기에서는 덕만이 장녀로 나오고 화랑세기에서는 천명이 장녀로 나오는 바, 쌍둥이일 가능성도 있고 어떤 사연이 있어서 서로 장녀라고 기록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화랑세기에서처럼 천명공주가 장녀일 경우 덕만이 삼국사기에서 장녀로 기록되는 이유는, 천명이 스스로 궁을 나가 진골로 강등 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삼국사기에서처럼 덕만이 장녀일 경우 화랑세기에서 천명을 장녀로 기록한 이유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가 되는 김용춘이 13대 풍월주이며, 김춘추가 18대 풍월주이므로 화랑의 선배가 되는 김춘추를 우대하여 김춘추의 어머니인 천명을 장녀로 기록하였을 수도 있겠다.

 

김춘추는 서기603년에 출생하였으므로 그 어머니 천명공주는 약20세를 계산하여 서기583년경에 출생한 것이된다.터울로 보면 천명이 장녀라면 덕만공주는 서기585년경에 출생하였을 수도 있고 덕만이 장녀라면 서기581년경에 출생하였을 수도 있는데 대략 서기583년경에 출생하였다고 가정해 본다.

그러면 진평왕은 서기579년에 왕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대략 17세가량 된다.덕만공주가 서기583년경에 출생하였으면 왕이 된 서기632년에는 이미 나이가 50세가 된다.즉 이미 할머니와 같은 나이가 되는 것이다.

 

처녀라고 전해지는 이야기는 잘못 된 것이며 삼국유사에서는 덕만공주의 남편이 음갈문왕이라고 명백히 기록되어 있고 경주김씨족보에도 김인평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선덕여왕을 노구(老軀)라고 하여 할머니임을 시사하고 있다.그래서 선덕여왕은 이미 할머니가 되는 약50세이상일 때 왕이 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즉 덕만공주는 서기583년경 이전에 출생한 것이 되는 것이다.

 

천명공주의 남편은 김춘추의 아버지가 되는 김용춘과 김용수가 있다. 김용수는 김용춘의 형이며 둘다 진지왕의 아들들이다. 원래 김춘추는 김용수와 천명공주의 아들인데 김용수가 죽으면서 아우 김용춘에게 맡겼다라고 보인다.

 

덕만공주의 남편은 기록에 김인평, 음갈문왕으로만 기록되어 있고 실제인물이 누구인지는 나타나지 않으며, 화랑세기에서는 덕만공주의 남편감으로 김용수, 김용춘, 흠반, 을제를 들고 있는데,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사이는 아니며 사신(私臣)이라고 보아 정치적으로 개인비서 역할을 한 인물들이라 할 것이다.실제 덕만공주는 김용춘을 사신으로 삼았고, 여왕이 되어서는 을제에게 국정을 맡기기도 하였다.

 

덕만공주의 정식 남편으로 거론되는 인물로 창녕조씨 시조인 조계룡(曺繼龍)이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김유신과 김춘추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고 하므로 김춘추의 아버지 항렬과 비슷하다고 보면 서기578년경이전에 출생한 인물이 되어 나이로 보면 덕만공주의 남편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조계룡이 아버지는 옥결이라는 인물로 비사벌가야의 왕손으로 전해지는 바, 김유신의 가계처럼 진골로 편입된 가야왕족이 될 것이다. 창녕조씨족보에 의하면 진평왕에 의하여 사성받았다 하고 진평왕 건복48년인 서기631년에 출생하였다고 하면서 진평왕의 딸고 혼인하였다라고 전하는 바, 만약 서기631년에 출생하였다면 진평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아니하므로 진평왕이 죽기전 1년전에 조계룡을 사성하였다는 말은 비사벌가야 왕손인 김00가 당시에 0曺0라는 벼슬에 있었으므로 성을 曺라 내리고 왕의 후예이므로 계룡이라 내렸다라고 보면, 서기631년에 진평왕이 덕만공주가 왕위에 즉위하는 데 장애가 없도록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으로 추정되고 이에 조계룡과 김유신과 김춘추가 힘을 모아 선덕여왕을 보필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그러므로 조계룡은 선덕여왕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인물이 되고 최소한 진평왕의 사위이므로 천명, 선화, 양명, 우야 공주가 아닌 다른 공주와 혼인한 것이 되는데, 기록상 아직까지 덕만, 천명, 선화, 양명, 우야 공주외에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있어 덕만공주일 가능성이 있게 된다.

 

조계룡의 벼슬이름에 曺라는 글자가 있었다고 보면 당시 신라말로 曺는 마실이란 말이 되는데, 삼국유사에 선덕여왕의 남편이 飮갈문왕이라고 하여 이 飮자가 "마실 음"자가 되는 바, 曺와 飮의 순 우리말 소리가 마실이 되어 같은 소리를 적은 다른 글자가 된다. 만약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曺가 아니라 金이나 다른 성씨라면 음갈문왕이 바로 조계룡이라는 결론이 된다.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曺라고 한다면 진평왕이 사성하였다는 조계룡은 원래 있었던 성씨를 인정하여 준 것이 된다. 서기631년에 조계룡이 탄생한 것으로 기록된 것을 비유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때 진평왕이 조계룡이라 사성한 것이 되고 갈문왕으로 봉한 것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고서 남편을 갈문왕으로 추봉하였다거나 봉하였다거나 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진평왕이 서기631년에 이미 조계룡을 갈문왕으로 봉하여 놓았기 때문이다.

 

飮갈문왕은 곧 曺갈문왕으로서 "마실"갈문왕이며, 성씨를 曺로 쓴 것은 한자 성씨를 본따 쓴 것이 되는 것이다. <조계룡의 원래 성씨가 曺라는 선대 족보 등을 보았거나 가지고 있는 분은 연락 요망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연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4. 선화공주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하여는 서동요라는 기록외에는 거의 전해지지 않으며 경주김씨선원보에도 전해지지 않으며 화랑세기에도 전하지 않는다.선화공주가 진평왕의 세째딸이라면 대략 서기583년~서기587년경에 출생한 것이 되며, 백제무왕이 임금이 된 서시600년에는 약14~18세가 되어 무리가 없게 된다. 선화공주가 16세에 서동을 따라 갔다면 서기585년이 된다. 타당성이 있게 된다.

 

5. 양명공주와 우야공주

그동안 다른 기록에는 찾아볼 수 없다가 화랑세기에 의하여 드러난 인물인데, 경주김씨선원보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양명공주의 아들이 22대 풍월주 양도(良圖)로서 서기610년 출생이므로 대략 서기59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되어 덕만과 천명, 선화공주보다 늦게 출생한 것이 되어 타당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왕위문제를 놓고 볼 때 성골의 남자가 없고 여자만 있다고 하면서 덕만공주와 승만공주(진덕여왕) 외는 언급이 없어 일단 진골로 추정되는 바, 진평왕의 둘째 부인인 승만부인손씨의 딸로 추정된다.우야공주는 그 남편이 20대 풍월주 예원(禮元)이며 서기606년에 출생하였으므로 대략 남편보다 5세가량 적다고 가정하면 서기610년경에 출생한 것이 되어 일단 타당성이 있게 된다.

서기610년이면 덕만공주나 천명공주는 이미 약28세가량 되는데, 진평왕이 약30년간 무진 아들을 낳으려고 애쓴 것 같다.

마야부인 김씨는 진평왕과 나이가 비슷하다고 보면 이때 진평왕이 46세가 되어 딸을 더이상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아 둘째부인인 승만부인 손씨의 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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