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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본문

ma01.png 20대 경덕왕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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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대왕릉 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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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대왕릉 비석

 

 

<景德王>立. 諱<憲英>, <孝成王>同母弟. <孝成>無子, 立<憲英>爲太子, 故得嗣位. 妃伊 <順貞>之女也. 

경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헌영이며, 효성왕의 동복 아우이다.

효성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헌영을 태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한 것이다. 왕비는 이찬 순정의 딸이다.

 

元年, 冬十月, <日本國>使至, 不納.

원년 겨울 10월, 일본국 사신이 왔으나 받아 들이지 않았다.

 

二年, 春三月, <主力公>宅, 牛一産三{五} 犢. <唐><玄宗>, 遣贊善大夫<魏曜>來吊祭. 仍冊王爲<新羅>王, 襲先王官爵, 制曰: "故開府儀同三司使(+充) 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持節寧海軍使<新羅>王<金承慶>弟<憲英>, 奕業{葉} 懷仁, 率心常禮, 大賢風敎, 條理尤明, 中夏軌儀, 衣冠素襲. 馳海琛而遣使, 準雲呂而通朝, 代爲純臣, 累 忠節. 頃者, 兄承土宇, 沒而絶嗣, 弟膺繼及, 抑惟常經, 是用賓懷, 優以冊命, 宜用舊業, 殺承藩長之名. 仍加殊禮, 載錫<漢>官之號, 可襲兄<新羅> 王開府儀同三司使持節大都督鷄林州諸軍事兼充持節寧海軍使." 幷賜御註『孝經』一部. 夏四月, 納舒弗邯<金義忠>女, 爲王妃. 秋八月, 地震. 冬十二月, 遣王弟入<唐>賀正. 授左淸道率府員外長史, 賜綠袍銀帶, 放還.

2년 봄 3월, 주력공의 집에서 소가 한번에 송아지 세 마리를 낳았다.

당 현종이 찬선대부 위요를 보내와 제사에 참여하게 하고, 이어 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여 선왕의 관작을 잇게 하였는데, 그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고 '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지절영해군사신라왕' 김 승경의 아우 헌영은 대대로 왕업을 계승하여 어진 생각을 품고, 상도에 맞는 예의에 마음을 두었으니, 기자(箕子)의 풍속과 교화는 조리가 더욱 밝아지고, 중국 제도의 의관도 스스로 답습하게 되었다. 바다를 통하여 사신을 보내오고, 구름을 벗삼는 먼 길을 따라 당 나라의 조정에 왕래하여, 대대로 사심 없는 신하로서 여러 번 충절을 나타내었다. 이전에 왕의 형이 국가를 계승하였으나, 그가 아들이 없어 아우가 그 뒤를 잇게되니, 이것도 상례일 것이므로, 이에 빈례로 우대하여 책명하노니, 마땅히 구업을 지켜 번국의 수장으로서의 명예를 계승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특별한 예우를 가하여 중국 관작의 칭호를 주노니 형의 관작인 '신라왕개부의동삼사사지절대도독계림주제군사겸충 지절영해군사'를 이어 받으라." 조서와 함께 황제의 명령으로 주해를 가한 [효경] 한 권을 주었다. 여름 4월, 서불한 김 의충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2월, 왕의 아우를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니, 황제가 그에게 좌청도솔부원외장사 벼슬을 주고, 초록빛 웃옷과 은대를 주어 돌려 보냈다.

 

三年, 春正月, 以伊 <惟正>爲中侍. 閏二月,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夏四月, 親祀神宮. 遣使入<唐>獻馬. 冬,{妖} 星出中天, 大如五斗器. 浹旬乃滅.

3년 봄 정월, 이찬 유정을 중시로 임명하였다.

윤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말을 바쳤다. 겨울에 이상한 별이 중천에 나타났는데, 크기가 닷말들이 그릇만 하였다.

이 별은 열흘 만에 사라졌다.

 

四年, 春正月, 拜伊 <金思仁>爲上大等. 夏四月, 京都雹, 大如鷄子. 五月, 旱. 中侍<惟正>退, 伊 <大正>爲中侍. 秋七月, 葺東宮. 又置司正府·少年監典·穢宮典.

4년 봄 정월, 이찬 김 사인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그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가뭄이 들었다. 중시 유정이 퇴직하자, 이찬 대정이 중시가 되었다. 가을 7월, 동궁을 수리하고, 또한 사정부와 소년감전과 예궁전을 설치하였다.

 

五年, 春二月,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夏四月, 大赦, 賜大 , 度僧一百五十人.

5년 봄 2월, 당에 사신을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여름 4월, 죄수들을 대사하고, 백성들을 위한 큰 연회를 베풀었다. 중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六年, 春正月, 改中侍爲侍中. 置國學諸業博士·助敎. 遣使入<唐>賀正, 幷獻方物. 三月, 震<眞平王陵>. 秋, 旱. 冬, 無雪. 民饑且疫, 出使十道安撫.

6년 봄 정월, 중시를 시중으로 고치고, 국학에 제업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고, 토산물을 바쳤다.

3월, 진평왕릉에 벼락이 쳤다. 가을에 가뭄이 들었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다.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으므로, 사방에 특사를 보내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위로하였다.

 

七年, 春正月, 天狗落地. 秋八月, 太后移居<永明新宮>. 始置貞察{員察} 一員, 糾正百官. 遣阿 <貞節>等, 檢察北邊.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7년 봄 정월, 천구성이 땅에 떨어졌다. 가을 8월, 태후가 새로 지은 영명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처음으로 정찰 한 명을 두어 백관을 규찰하여 바로 잡게 하였다. 아찬 정절 등을 파견하여 북쪽 변경을 시찰하게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八年, 春三{二} 月, 暴風拔木. 三月, 置天文博士一員·漏刻博士六員.

8년 봄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3월, 천문 박사 한 명과 누각 박사 여섯 명을 두었다.

 

九年, 春正月, 侍中<大正>免, 伊 <朝良>爲侍中. 二月, 置御龍省奉御二員.

9년 봄 정월, 시중 대정이 사직하자, 이찬 조량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어룡성에 봉어 두 명을 두었다.

 

十一年, 春三月, 以級 <原神>·<龍方>爲大阿 . 秋八月, 置東宮衙官. 冬十月, 加置倉部史三人.

11년 봄 3월, 급찬 원신과 용방을 대아찬으로 삼았다.

가을 8월, 동궁아관을 두었다.

겨울 10월, 창부에 사 3명을 더 두었다.

 

十二年, 秋八月, <日本國>使至, 慢而無禮, 王不見之, 乃廻. <武珍州>獻白雉.

12년 가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는데, 그가 오만무례하므로 왕이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는 곧 돌아갔다.

무진주에서 흰 꿩을 바쳤다.

 

十三年, 夏四月, 京都雹, 大如鷄卵. 五月, 立<聖德王>碑. <牛頭州>獻瑞芝. 秋七月, 王命官修葺<永興>·<元延{元永} > 二寺. 八月, 旱, 蝗. 侍中<朝良>退.

13년 여름 4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크기가 달걀 정도였다. 5월, 성덕왕의 비석을 세웠다.

우두주에서 상서로운 지초를 바쳤다. 가을 7월, 왕이 관원을 시켜 영흥사와 원연사를 수리하였다.

8월,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시중 조량이 퇴직하였다.

 

十四年, 春,貴民饑. <熊川州><向德>, 貧無以爲養, 割股肉, 飼其父. 王聞, 賜賚頗厚, 仍使旌表門閭. <望德寺>塔動.[<唐> <令狐澄>『新羅國記』曰: "其國, 爲<唐>立此寺, 故以爲名. 兩塔相對高十三層, 忽震動開合, 如欲傾倒者數日. 其年<祿山>亂, 疑其應也."] 夏四月, 遣使入<唐>賀正. 秋七月, 赦罪人, 存問老疾鰥寡孤獨, 賜 有差. 以伊 <金耆>爲侍中.

14년 봄, 곡식이 귀하여 백성들이 굶주렸다. 웅천주의 향덕이라는 사람이 가난하여 그 아버지를 봉양할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의 다리 살을 베어 아버지에게 먹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그에게 선물을 후히 주고, 동시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망덕사 탑이 흔들렸다.[당 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에 "신라가 당 나라를 위하여 이 절을 세운 까닭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두 탑은 마주 보고 있으며, 높이는 13층이다.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하며 곧 넘어질 듯하였다. 이러한 일이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이 해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는데 아마도 그 감응이 아닌가 한다"라고 기록되어있다.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신년 하례를 하였다.

가을 7월, 죄수들을 석방하고, 늙고 병든 이·홀아비·과부·고아·자식없는 노인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곡식을 주었다.

이찬 김 기를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上大等<金思仁>, 以比年災異屢見, 上疏極論時政得失, 王嘉納之. 王聞<玄宗>在<蜀>, 遣使入<唐>, 芟<江>至<成都>, 朝貢. <玄宗>御製御書五言十韻詩, 賜王曰: "嘉<新羅>王歲修朝貢, 克踐禮樂名義, 賜詩一首: 四維分景緯, 萬象含中樞. 玉帛遍天下, 梯航歸上都. 緬懷阻靑陸, 歲月勤黃圖. 漫漫窮地際, 蒼蒼連海隅. 興言名義國, 豈謂山河殊. 使去傳風敎, 人來習典謨. 衣冠知奉禮, 忠信識尊儒. 誠矣天其鑑, 賢哉德不孤. 擁 同作牧, 厚 比生 . 益重靑靑志, 風霜恒不 ." 帝幸<蜀>時, <新羅>能不遠千里, 朝聘行在所, 故嘉其至誠, 賜之以詩. 其云: "益重靑靑志, 風霜恒不 "者, 豈古詩"疾風知勁草, 叛{板} 蕩識貞臣"之意乎. <宣和>中, 入朝使臣<金富儀>將刻本, 入< 京>, 示?伴學士<李 >. <李 >上皇帝, 因宣示兩府及諸學士訖, 傳宣曰: "進奉侍郞所上詩, 眞明皇書." 嘉嘆不已. 夏四月, 大雹. <大永郞>獻白狐, 授位南邊第一.

15년 봄 2월, 상대등 김 사인이, 해마다 천재지변이 자주 일어난 사실을 들어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상소는 시국 정치의 옳고 그름을 극렬하게 비평한 것이었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받아 들였다. 왕이, 당 현종이 촉 지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에게 사신을 보냈다. 사신은 양자강을 거슬러 올라가 성도에 이르러 조공하였다. 현종은 5언 10운 시를 직접 짓고 써서 왕에게 보내며 말했다. "신라왕이 해마다 조공을 잘 하고, 예악 및 대의명분을 훌륭하게 실행에 옮기므로, 시 한편을 지어 주노라. 사방은 위도로 나뉘어 있으나만물은 모두 중심을 가지고 있네.

옥과 비단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으나산 넘고 물 건너 중국의 서울로 찾아 든다. 생각하면 먼 곳 동방은 막혔건만해마다 신라는 중국을 위해 힘을 쓰네.

아득히 먼 곳 땅의 끝푸른 바다 한 구석에 자리하건만대의 명분 지키는 나라라고 일컬어지니산 다르고 물 다른 나라라고 어찌 부르랴.

사신은 돌아가 중국의 풍교를 전하고사람들은 찾아와 우리의 옛 고전을 배워 가는구나.의관을 예절에 맞출 줄 알고충성스럽고 신의를 지키며 학문을 존중할 줄 아나니, 그 성실함이여, 하늘이 굽어 볼 것이오, 그 현명함이여, 덕행은 외롭지 않으리!

깃발 세우고 우리처럼 백성을 다스리니보내 준 후한 선물 정성이 넘치나니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바람 서리 맞아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

현종이 촉 지방에 갔을 때, 신라가 천리 길을 멀다 하지 않고, 황제의 행재소까지 찾아 갔으므로, 그 지성을 가상히 여겨 시를 지어 준 것이다.

싯구 중의 "푸르고 푸른 지조 더욱 소중히 하여, 바람 서리 맞아도 영원히 변하지 말라"라고 한 것은, 옛날의 싯구인 "강한 바람이 불어야만 강한 풀을 알게 되고, 정치가 문란한 뒤에야 지조 있는 신하를 알 수 있다" 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선화 연간에 송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 부의가 이 시의 각본을 가지고 변경에 가서 접대원으로 있던 학사 이 병에게 보였다.

이 병은 이를 황제에게 바쳤는데, 황제는 양부와 여러 학사들에게 돌려 보이고, 황제의 의견을 말하기를 "진봉 시랑이 바친 시는 틀림 없는 현종의 글씨이다"라고 하면서 감탄하였다. 여름 4월, 큰 우박이 내렸다. 대영랑이 흰 여우를 바쳤으므로, 남변 제일의 직위를 주었다.

 

十六年, 春正月, 上大等<思仁>病免, 伊 <信忠>爲上大等. 三月, 除內外群官月俸, 復賜祿邑. 秋七月, 重修<永昌宮>. 八月, 加調府史二人. 冬十二月, 改<沙伐州>爲<尙州>, 領州一, 郡十, 縣三十; < 良州>爲<良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二, 縣三十四; <菁州>爲<康州>, 領州一, 郡十一, 縣二十七; <漢山州>爲<漢州>, 領州一, 小京一, 郡二十七, 縣四十六; <首若州> 爲<朔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一, 縣二十七; <熊川州>爲<熊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三, 縣二十九; <河西州>爲<溟州>, 領州一, 郡九, 縣二十五; <完山州>爲<全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 縣三十一; <武珍州>爲<武州>, 領州一, 小京一, 郡十四, 縣四十四. [<良州>一作<梁州>.]

16년 봄 정월, 상대등 김 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신충이 상대등이 되었다. 3월, 서울과 지방 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다시 녹읍을 주었다.

가을 7월, 영창궁을 중수하였다. 8월, 조부에 사 2명을 더 두었다. 겨울 12월,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30현을 소속시켰다. 삽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2군 34현을 소속시켰다. 청주를 강주로 고치고, 1주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한산주를 한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27군 46현을 소속시켰다.

수약주를 삭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1군 27현을 소속시켰다. 웅천주를 웅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3군 29현을 소속시켰다.

하서주를 명주로 고치고, 1주 9군 25현을 소속시켰다. 완산주를 전주로 고치고, 1주 1소경 10군 31현을 소속시켰다.

무진주를 무주로 고치고, 1주 14군 44현을 소속시켰다.['良州'는 '梁州'로 쓰기도 한다.]

 

十七年, 春正月, 侍中<金耆>卒, 伊 <廉相>爲侍中. 二月, 下敎: 內外官請暇滿六十日者, 聽解官. 夏四月, 選醫官精究者, 充內供奉. 置律令博士二員. 秋七月二十三日, 王子生. 大雷電, 震佛寺十六所. 八月, 遣使入<唐>朝貢.

17년 봄 정월, 시중 김 기가 죽자, 이찬 염 상이 시중이 되었다. 2월, 왕이 교서를 내려서, 내외의 관원을 막론하고 휴가를 만 60일 이상 얻은 자는 해직으로 인정하였다. 여름 4월, 의술을 깊이 연구한 자를 선발하여, 내공봉을 맡도록 하였다. 율령 박사 두 명을 두었다. 가을 7월 23일, 왕자가 탄생하였다. 우레와 번개가 심하였고, 16곳의 절에 벼락이 쳤다. 8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十八年, 春正月, 改兵部·倉部卿·監爲侍郞, 大舍爲郞中, 改執事舍知爲執事員外郞, 執事史爲執事郞. 改調府·禮部·乘府·船府· 領客府·左右議方府·司正府·位和府·例作典·大學監·大道署·永昌宮等大舍爲主簿. 賞賜署·典祀署·音聲署·工匠府·彩典等大舍爲主書. 二月, 改禮部舍知爲司禮, 調府舍知爲司庫, 領客府舍知爲司儀, 乘府舍知爲司牧, 船府舍知爲同舟{司舟} , 例作府舍知爲司例, 兵部弩舍知爲司兵, 倉部租舍知爲司倉. 三月, 彗星見, 至秋乃滅.

18년 봄 정월, 병부와 창부의 경과 감을 시랑으로, 대사를 낭중으로, 집사부의 사지를 집사원외랑으로, 집사사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 조부·예부·승부·선부·영객부·좌우의방부·사정부·위화부·예작전·태학감·대도서·영창궁 등의 대사를 주부로 개칭하였으며, 상사서·전사서·음성서·공장부·채전 등의 대사를 주서로 개칭하였다. 2월, 예부의 사지를 사례로, 조부의 사지를 사고로, 영객부의 사지를 사의로, 승부의 사지를 사목으로, 선부의 사지를 사주로, 예작부의 사지를 사례로, 병부의 노사지를 사병으로, 창부의 조사지를 사창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3월, 혜성이 나타났다. 이 혜성은 가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十九年, 春正月, 都城寅方, 有聲如伐鼓, 衆人謂之鬼鼓. 二月, 宮中穿大池. 又於宮南<蚊川>之上, 起<月淨>·<春陽>二橋. 夏四月, 侍中<廉相>退, 伊 <金邕>爲侍中. 秋七月, 封王子<乾運>, 爲王太子.

19년 봄 정월, 서울 동쪽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이를 귀신이 치는 북 소리라고 말하였다.

2월, 대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또한 대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춘양교의 두 다리를 놓았다.

여름 4월, 시중 염 상이 퇴직하고, 이찬 김 옹이 시중이 되었다.

가을 7월, 왕자 건운을 왕태자로 봉하였다.

 

二十年, 春正月朔, 虹貫日, 日有珥. 夏四月, 彗星出.

20년 봄 정월 초하룻날,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였고 햇무리가 보였다.

여름 4월, 혜성이 나타났다.

 

二十一年, 夏五月, 築<五谷>·< 巖>·<漢城>·<獐塞>·<池城>·<德谷>六城, 各置太守. 秋九月, 遣使入<唐>朝貢.

21년 여름 5월, 오곡·휴암·한성·장새·지성·덕곡의 여섯 성을 쌓고, 각각 태수를 두었다.

가을 9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二年, 夏四月, 遣使入<唐>朝貢. 秋七月, 京都大風, 飛瓦拔樹. 八月,{桃} 李再花. 上大等<信忠>·侍中<金邕>免. 大奈麻<李純>爲王寵臣, 忽一旦避世入山, 累徵不就. 剃髮爲僧, 爲王創立<斷俗寺>, 居之. 後, 聞王好樂, 卽詣宮門. 諫奏曰: "臣聞: 昔者,<桀>·<紂>荒于酒色, 淫樂不止. 由是, 政事凌遲{夷} , 國家敗滅, 覆轍在前, 後車宜戒. 伏望: 大王改過自新, 以永國壽. " 王聞之感歎, 爲之停樂. 便引之正室, 聞說道妙, 以及理世之方, 數日乃止.

22년 여름 4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기와가 날리고 나무가 뽑혔다.

8월, 복숭아와 오얏나무 꽃이 두 번째 피었다.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 옹이 퇴직하였다. 대내마 이 순은 왕의 총신이었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피하여 산으로 들어 갔는데,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그 후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말을 듣고 그는 즉시 대궐문으로 찾아갔다. 그는 왕에게 "제가 듣건대 옛날 걸주가 주색에 빠져 황음을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로 인하여 정치가 문란하고 나라가 망하였다고 합니다. 앞에 가는 수레 바퀴가 엎어지면 뒷 수레는 마땅히 이를 경계 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왕은 허물을 고치고 자신을 새롭게 바꾸어 나라를 영원히 보존하소서"라고 간하였다.

왕은이 말을 듣고 감탄하여 풍악을 그치게 하고, 그를 큰 방으로 인도하여 도리의 오묘함과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며칠 동안이나 들었다.

 

二十三年, 春正月, 伊 <萬宗>爲上大等, 阿 <良相>爲侍中. 三月, 星 于東南. 龍見<楊山>下, 俄而飛去. 冬十二月十一日, 流星或大或小, 觀者不能數.

23년 봄 정월, 이찬 만종이 상대등이 되고, 아찬 양상이 시중이 되었다.

3월, 혜성이 동남쪽에 나타나고, 용이 양산 밑에 나타났다가 얼마 안되어날아갔다.

겨울 12월 11일, 크고 작은 유성이 나타났는데, 이를 본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다.

 

二十四年, 夏四月, 地震. 遣使入<唐>朝貢, 帝授使者檢校禮部尙書. 六月, 流星犯心. 是月, 王薨. 諡曰<景德>, 葬<毛祇寺> 西岑.[『古記』云: "<永泰>元年乙巳卒." 而『舊唐書』及『資理通鑑』皆云: "<大曆>二年, <新羅>王<憲英>卒." 豈其誤耶.]

24년 여름 4월, 지진이 있었다.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조공하니, 황제가 사신에게 검교예부상서 벼슬을 주었다. 6월,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 [고기에는 '영태 원년 을사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와 [자리통감]에는 모두 '대력 2년에 신라왕 헌영이 사망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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