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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본문

ma01.png 24대 소성왕본기

 

 

<昭聖[或云<昭成>]王>立. 諱<俊邕>, <元聖王>太子<仁謙>之子也. 母, <金>氏. 妃, <金>氏<桂花>夫人, 大阿 <叔明> 女也. <元聖大王>元年, 封子<仁謙>爲太子, 至七年卒, <元聖>養其子於宮中. 五年, 奉使大<唐>, 受位大阿 ; 六年, 以波珍 爲宰相; 七年爲侍中; 八年爲兵府令{兵部令} ; 十一年爲太子, 及<元聖>薨, 繼位. 

소성왕['昭聖'을 '昭成'으로도 쓴다.]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준옹이며, 원성왕의 태자 인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이고, 왕비는 김씨 계화부인이며 대아찬 숙명의 딸이다. 원성대왕 원년에 그의 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하였으나 7년에 죽었으므로 원성이 태자의 아들을 궁중에서 길렀다. 

원성은 5년에 사신으로 당 나라에 가서 대아찬 직위를 받았고, 6년에 파진찬으로 재상이 되었고, 7년에는 시중이 되었고, 8년에는 병부령이 되었고, 11년에는 태자가 되었다가, 원성이 사망하자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元年, 春三月, 以<菁州><居老縣>爲學生祿邑. <冷井縣>令<廉哲>進白鹿. 夏五月, 追封考<惠忠太子>爲<惠忠大王>. <牛頭州>都督遣使奏言: "有異獸若牛, 身長且高, 尾長三尺許, 無毛長鼻, 自<峴城川>向<烏食壤>去." 秋七月, 得人蔘九尺, 甚異之, 遣使如<唐>進奉, <德宗>謂非人蔘, 不受. 八月, 追封母<金>氏爲<聖穆太后>. <漢山州>獻白烏.

원년 봄 3월, 청주의 거노현을 국학생의 녹읍으로 정하였다. 냉정현령 염 철이 흰 사슴을 진상하였다. 여름 5월, 왕의 아버지인 혜충 태자를 혜충대왕으로 추봉하였다. 우두주 도독이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했다. "소와 비슷한 이상한 짐승이 나타났습니다. 그 짐승의 몸체는 길고 크며, 꼬리 길이가 석 자 쯤 되고, 털은 없고 코가 긴 데, 현성천에서 오식양을 향하여 갔습니다."가을 7월, 길이가 아홉 자인 인삼을 얻었다. 이를 매우 기이하게 여겨서 사신에게 주어 당 나라에 바쳤다. 덕종은 인삼이 아니라하여 받지 않았다.

8월, 어머니 김씨를 성목태후로 추봉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바쳤다.

 

二年, 春正月, 封妃<金>氏爲王后, 以<忠芬>爲侍中. 夏四月, 暴風折木蜚瓦, <瑞蘭殿>簾飛不知處, <臨海>·<仁化>二門壞. 六月, 封王子爲太子. 王薨, 諡曰<昭聖>.

2년 봄 정월, 왕비 김씨를 왕후로 봉하고, 충분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기와가 날렸다. 서란전에 쳤던 발이 날아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으며, 임해문과 인화문이 무너졌다. 6월,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 『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改之. 秋, 國西, 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5경,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활 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五年, 春正月甲辰朔, 日有食之. <漢山州>民饑, 出粟以 之. 秋七月, 隕霜傷 .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 <毛肖> {駁} 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王從之.

 

論曰: "惟學焉然後聞道, 惟聞道然後灼知事之本末. 故學而後仕者, 其於事也, 先本而末自正. 譬如擧一綱, 萬目從而皆正. 不學者反此, 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 但區區弊精神於枝末, 或 {斂} 以爲利, 或苛察以相高, 雖欲利國安民, 而反害之. 是故, 『學記』之言, 終於'務本', 而『書』亦言: '不學牆面, 事惟煩.' 則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임명하였는데, 집사사 모초가 반박하여 "자옥은 학문을 잘하여 등용된 것이 아니므로 지방 장관의 관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중이 "비록 학문을 잘하여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일찌기 당 나라에 가서 학생이 된 적이 있으니, 역시 등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왕은 시중의 말을 따랐다.

저자의 견해 : 오직 학문을 닦은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알고난 이후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이니,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정신을 지엽적인 것에만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규찰하는 것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할지라도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학기]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며, 직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는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六年, 春正月, 以<宗基>爲侍中. 增築<碧骨堤>, 徵<全州>等七州人, 興役. <熊川州>進赤烏. 三月, 以一吉 <伯魚>使北國. 大旱. 夏四月, 太白辰星, 聚于東井. 五月, 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6년 봄 정월, 종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금성과 진성이 동정성좌에 모였다.

5월, 한산·웅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 <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 <俊邕>爲侍中. 十一{二} 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 .

7년 봄 정월,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 당했다. 웅천주 대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이 되었다.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大子{太子} . 上大等<忠廉>卒, 伊 <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 <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8년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미인 김 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 <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鳥{白烏} . 起<望恩樓>於宮西.

10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 .

11년 봄 정월,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형량을 낮추어 주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 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 <智原>爲侍中.

12년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이 병부령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되었다.

 

十三年, 秋九月, 國東, 蝗害 ,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 <金三朝>爲侍中.

13년 가을 9월,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사직하였다. 아찬 김 삼조가 시중이 되었다.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望德寺>二塔相擊. 夏六月, 旱. <屈自郡><石南烏>大舍妻, 一産三男一女.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唐書』云: "<貞元>十四年, <敬信>死." 『通鑑』云: "<貞元>十六年, <敬信>死." 以本史孝{考} 之, 『通鑑』, 誤.]

14년 봄 3월,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 대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

[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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