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23대 원성왕본기 |
|
봉분은 병풍석을 두르고있고 십이 지신의 동물들을 순서에 따라 12 방위로 배열하여 통일이후
전성기의 안정된 왕릉의 모습과 그당시 당나라를 모방하지 않는 독창적 발상에 의하여 완성된 능제이며
괘릉아라는 왕릉의 설계가 우리나라 역대 왕릉 구조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 괘릉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능원에 들어서기전 입구를 지키는 무인상 문인석 인줄 알았는데 소매자루 속에 두손을 모으고
관복속에 쥔 긴칼이 발끝까지 보이며 관복의 뒷모습은 갑옷무늬를 장식하고 있슴
서역무인상 으로 불끈쥔 주먹에 힘이넘쳐 흐르며 그당시 실크로드로 통해 들어온 서역인들을 무인으로
등용한점에 세계화는 복고적이 아닌가싶다.
능원옆 우물 제례행사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시사철 맑은 물과 수량이 변함 없는 것으로 알고있다.
석사자상의 익살스런 모습과 방향이 서로 나뉘어져있다
신라 38대 원성왕 김 경신이 머리에 쓴 두건을 벗고 흰갓을 스고 12 현금을들고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꾸고 이에 점을 치니 두건을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것은 목에 칼을 쓸징조요 우물에 들어가는것은 옥에갇일 징조다는 말을 듣고 두문 불출 하고 있을때 아찬여삼이 해몽을 청하여 공이 자리에 올라서 나를 버리지 않는 다면 해몽하기를 청하여 주위 사람들을 물리칠 것을청하였다.두건을 벗는것은 위에 앉을 사람이 없음이요.
흰갓을 쓴것은 면루관을 쓸징조요 12현금을 든것은 나물왕 12대 자손이 왕위를 이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것은 궁귈로들어갈 상서로 해몽하여 김경신 이 위에 주원이 있으니 내가어찌 왕위에오를수있으랴 하니 여삼이 비밀리에 북천의 신에게 제사 지내면 될것이다 하였다.
선덕왕이 승하 하자 홍수로 인하여 북천물이 범람하여 주원에게 전할수있는 방법이 없자 한시도 왕의 자리를 비울수 없다 하여 경신이 신라의 38대 원성왕으로 추대되었으며 원성왕 김경신은 물과의 인연이 각별한왕으로 무덤조차 물을 떠나지 못하고 널을 괴서 마지막을 물과 함께 하신것같다.
● <元聖王>立. 諱<敬信>, <奈勿王>十二世孫. 母, <朴>氏<繼烏>夫人; 妃, <金>氏, <神述>角干之女. 初, <惠恭王>末年, 叛臣跋扈, <宣德>時爲上大等, 首唱除君側之惡. <敬信>預之, 平亂有功, <宣德>卽位, 邦{卽} 爲上大等. 及<宣德>薨, 無子. 群臣議後, 欲立王之族子<周元>. <周元>宅於京北二十里, 會, 大雨, <閼川>水漲, <周元>不得渡. 或曰: "卽人君大位, 固非人謀, 今日暴雨, 天其或者不欲立<周元>乎? 今上大等<敬信>, 前王之弟, 德望素高, 有人君之體." 於是, 衆議翕然, 立之繼位. 旣而雨止, 國人皆呼萬歲. 二月, 追封高祖大阿 <法宣>爲<玄聖大王>, 曾祖伊 <義寬>爲<神英大王>, 祖伊 <魏文>爲<興平大王>, 考一吉 <孝讓>爲 <明德大王>, 母<朴>氏爲<昭文太后>, 立子<仁謙>, 爲王太子. 毁<聖德大王>·<開聖大王>二廟, 以<始祖大王>· <太宗大王>·<文武大王>及祖<興平大王>·考<明德大王>爲五廟. 增文武百官爵一級. 拜伊 兵部令<忠廉>爲上大等. 伊 <悌恭> 爲侍中, <悌恭>免, 伊 <世强>爲侍中. 三月, 出前妃<具足王后>於外宮, 賜租三萬四千石. <浿江鎭>進赤烏. 改摠管爲都督.
원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이다. 왕비는 김씨이니 신술 각간의 딸이다. 처음 혜공왕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발호하였는데, 선덕이 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 측근의 악당들을 제거할 것을 앞장 서서 주장하였다. 경신이 이에 동조하여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선덕이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한 후, 왕의 족질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 때 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때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임금이라는 큰 지위는 실로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니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을 가졌다"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여,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였다. 얼마 후 비가 그치니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2월, 왕의 고조부 대아찬 법선을 현성대왕으로 추봉하고, 증조부 이찬 의관을 신영대왕으로, 조부 이찬 위문을 흥평대왕으로, 아버지 일길찬 효양을 명덕대왕으로, 어머니 박씨를 소문태후로 추봉하고, 아들 인겸을 왕태자로 삼았다. 성덕대왕과 개성대왕의 두 묘당을 헐고, 시조대왕과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조부 흥평대왕과 부 명덕대왕을 5묘로 정하였다.
문무 백관에게 작위를 한 급씩 올려주었다. 이찬 병부령 충렴을 상대등으로 임명하고, 이찬 제공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가, 제공이 퇴직하자, 이찬세강을 시중으로 임명하였다. 3월, 전 왕비 구족왕후를 외궁으로 내보내고, 벼 3만 4천 석을 주었다.
패강진에서 붉은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총관을 고쳐 도독이라 하였다.
● 二年, 夏四月, 國東雨雹, 桑麥皆傷. 遣<金元全>入<唐>, 進奉方物. <德宗>下詔書曰: " <新羅>王<金敬信>. <金元全>至, 省表及所進奉具悉. 卿俗敦信義, 志秉貞純, 夙奉邦家, 克遵聲敎. 撫玆藩服, 皆 儒風, 禮法興行, 封部寧乂, 而竭誠向闕, 述職無虧. 累遣使臣, 聿修貢獻, 雖溟渤遐廣, 道路悠長, 贄幣往來, 率循舊興{典} , 忠 益著, 嘉歎良深. 朕君臨萬方, 作人父母, 自中及外, 合軌同文, 期致太和, 共 仁壽. 卿宜保安封內, 勤恤蒼生, 永作藩臣, 以寧海裔. 今賜卿羅錦綾綵等三十匹, 衣一副, 銀 一口, 至宜領之; 妃錦綵綾羅等二十匹, 押金線繡羅裙衣一副, 銀椀一; 大宰相一人衣一副, 銀椀一; 次宰相二人各衣一副, 銀椀各一. 卿宜領受分給. 夏中盛熱, 卿比平安好, 宰相已下, 存問之. 遣書指不多及." 秋七月, 旱. 九月, 王都民饑, 出粟三萬三千二百四十石以賑給之. 冬十月, 又出粟三萬三千石以給之. 大舍<武烏>, 獻『兵法』十五卷·『花鈴圖』二卷, 授以<屈 縣{屈岬縣 /屈押縣 }>令.
2년 여름 4월, 동쪽 지방에 우박이 내려 뽕과 보리가 모두 상하였다. 김 원전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당 나라 덕종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신라왕 김 경신에게 말하노라. 김 원전이 와서 바친 표문과 진상한 물건을 살펴 보았다.
그대 나라의 풍속은 신의를 중시하고, 지조는 바르며, 일찍부터 중국의 번방으로서 교시를 잘 받들었다.
또한 변방에 속한 무리들을 훌륭하게 진무하였으며, 유교의 풍습을 받들어 예법이 성행하고, 나라가 평안하게 다스려졌으며, 중국에 정성을 다하고, 천자에게 직무를 보고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또한 자주 사신을 보내 조공과 진상을 계속하였고, 비록 바닷길이 멀고 육로로도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폐백의 왕래가 옛법을 따르고, 충성은 더욱 드러나니 더없이 가상하고 감탄할 일이다.
나는 만방에 백성의 부모로 군림하였으니, 안으로부터 중외에 이르기까지, 법도에 맞게하며, 문화를 공유하고, 태평화락을 이루어서, 모두와 함께 안락장수의 경계에 오르고자 한다.
그대는 마땅히 국내를 안정시키고, 백성들을 열성으로 구휼하며, 길이 변방의 신하가 되어, 바다 변방의 백성들을 평안케 하라. 이제 그대에게 비단·능직·채단 등 30필과 옷 한벌·은합 한 개를 주노니, 이들이 도착하면 받을 것이며, 왕비에게 비단·채단·능직 등 20필과 금실로 수놓은 비단 치마 한 벌과 은쟁반 한 개를, 가장 높은 재상 한 사람에게 옷 한벌과 은합 한개를, 다음 직위의 재상 두 사람에게는 각각 옷 한 벌과은쟁반 한 개를 준다. 그대는 이를 받아서 나누어 주라. 여름이 깊어 날씨가 더워지는데, 그대 내내 평안하기 바라며, 재상 이하 모두에게도 안부를 묻는다. 글월로는 나의 뜻을 다싣지 못하노라." 가을 7월, 가뭄이 들었다.
9월, 서울에 기근이 들어 곡식 3만 3천 2백 40석을 내어 구제하였고, 겨울 10월에도, 곡식 3만 3천 석을 나누어 주었다.
대사 무오가 병법 15권과 화령도 2권을 바쳤으므로, 굴압 현령으로 임명 하였다.
● 三年, 春二月, 京都地震. 親祀神宮. 大赦. 夏五月, 太白晝見. 秋七月, 蝗害 . 八月辛巳朔, 日有食之.
3년 봄 2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5월,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8월 초하루 신사일에 일식이 있었다.
● 四年, 春,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 『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改之. 秋, 國西, 旱蝗, 多盜賊, 王發使安撫之.
4년 봄, 처음으로 독서 삼품과를 설치하여 벼슬을 주었다. [춘추좌씨전]·[예기]·[문선]을 읽어서 그 뜻을 능히 알고, 이와 동시에 [논어]와 [효경]에 밝은 자를 상등으로 하고, [곡례]·[논어]·[효경]을 읽은 자를 중등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5경, 3사, 제자백가서에 모두 능통한 자는 절차를 밟지 않고 등용하였다. 예전에는 활 쏘기만으로 인물을 선발하던 것을 이 때에 와서 바꾼 것이다.
가을, 서쪽 지방에 가뭄이 들고, 메뚜기 떼가 나타나고, 도적이 많이 일어났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무하였다.
● 五年, 春正月甲辰朔, 日有食之. <漢山州>民饑, 出粟以 之. 秋七月, 隕霜傷 . 九月, 以<子玉>爲<楊根縣>小守, 執事史 <毛肖> {駁} 言: "<子玉>不以文籍出身, 不可委分憂之職." 侍中議云: "雖不以文籍出身, 曾入大<唐>爲學生, 不亦可用耶? " 王從之.
● 論曰: "惟學焉然後聞道, 惟聞道然後灼知事之本末. 故學而後仕者, 其於事也, 先本而末自正. 譬如擧一綱, 萬目從而皆正. 不學者反此, 不知事有先後·本末之序, 但區區弊精神於枝末, 或 {斂} 以爲利, 或苛察以相高, 雖欲利國安民, 而反害之. 是故, 『學記』之言, 終於'務本', 而『書』亦言: '不學牆面, 事惟煩.' 則執事<毛肖>一言, 可爲萬世之模範者焉."
5년 봄 정월 초하루 갑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한산주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9월, 자옥을 양근현 소수로 임명하였는데, 집사사 모초가 반박하여 "자옥은 학문을 잘하여 등용된 것이 아니므로 지방 장관의 관직을 맡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시중이 "비록 학문을 잘하여 출세한 것은 아니지만, 일찌기 당 나라에 가서 학생이 된 적이 있으니, 역시 등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자 왕은 시중의 말을 따랐다.
저자의 견해 : 오직 학문을 닦은 연후에 도리를 알게 되고, 도리를 알고난 이후에야 사물의 근본과 말단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문을 연마한 뒤에 벼슬을 하는 자는, 사물에 대하여 근본적인 것을 먼저 바르게 처리하므로, 말단은 저절로 바르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물의 벼리 하나를 들면, 만 개의 그물코가 바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학문을 연마하지 않은 자는 이와 반대이니, 사물에 선후와 본말의 순서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다만 구구하게 정신을 지엽적인 것에만 빼앗기게 되어,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으로 이익을 삼기도 하고, 백성을 까다롭게 규찰하는 것으로 높은 체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은 비록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려고 할지라도 도리어 해가 된다. 그러므로 [학기]는 "근본에 힘써야 한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으며, [상서]에도 또한 "배우지 않으면 벽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답답하며, 직번거롭게 일을 처리한다"고 하였으니, 집사 모초의 한 마디는 만대의 모범이 될 만하다.
● 六年, 春正月, 以<宗基>爲侍中. 增築<碧骨堤>, 徵<全州>等七州人, 興役. <熊川州>進赤烏. 三月, 以一吉 <伯魚>使北國. 大旱. 夏四月, 太白辰星, 聚于東井. 五月, 出粟賑<漢山>·<熊川>二州饑民.
6년 봄 정월, 종기를 시중에 임명하였다.
벽골제를 증축하였다. 전주 등 일곱 주의 사람을 징발하여 이 공사를 하였다.
웅천주에서 붉은 까마귀를 바쳤다.
3월, 일길찬 백어를 북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 금성과 진성이 동정성좌에 모였다.
5월, 한산·웅천 두 주의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 七年, 春正月, 王太子卒, 諡曰<惠忠>. 伊 <悌恭>叛, 伏誅. <熊川州><向省>大舍妻, 一産三男. 冬十月, 京都雪三尺, 人有凍死. 侍中<宗基>免, 大阿 <俊邕>爲侍中. 十一{二} 月, 京都地震. 內省侍郞<金言>爲三重阿 .
7년 봄 정월, 왕태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혜충이라 하였다.
이찬 제공이 반역하다가 처형 당했다.
웅천주 대사 향성의 아내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겨울 10월, 서울에 눈이 석 자나 내리고 사람이 얼어 죽었다.
시중 종기가 퇴직하자, 대아찬 준옹이 시중이 되었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내성 시랑 김언이 3중 아찬이 되었다.
● 八年, 秋七月, 遣使入<唐>, 獻美女<金井蘭>, 其女國色身香. 八月, 封王子<義英>爲大子{太子} . 上大等<忠廉>卒, 伊 <世强>爲上大等. 侍中<俊邕>病免, 伊 <崇斌>爲侍中. 冬十一月壬子朔, 日有食之.
8년 가을 7월,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미인 김 정란을 바쳤다. 그녀는 국색으로서 몸에서 향내가 났다.
8월, 왕자 의영을 태자로 봉하였다. 상대등 충렴이 죽자, 이찬 세강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시중 준옹이 병으로 사직하자, 이찬 숭빈을 시중으로 삼았다. 겨울 11월 초하루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 九年, 秋八月, 大風折木偃禾. 奈麻<金惱>獻白雉.
9년 가을 8월, 큰 바람이 불어와 나무가 꺾이고 벼가 쓰러졌다.
내마 김뇌가 흰 꿩을 바쳤다.
● 十年, 春二月, 地震. 太子<義英>卒, 諡曰<憲平>. 侍中<崇斌>免, 以 <彦昇>爲侍中. 秋七月, 始創<奉恩寺>. <漢山州>進白鳥{白烏} . 起<望恩樓>於宮西.
10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태자 의영이 사망하자 시호를 헌평이라 하였다.
시중 숭빈이 사직하자, 잡찬 언승을 시중으로 삼았다.
가을 7월, 봉은사를 창건하였다.
한산주에서 흰 까마귀를 진상하였다.
망은루를 대궐 서쪽에 세웠다.
● 十一年, 春正月, 封<惠忠太子>之子<俊邕>爲太子. 夏四月, 旱, 親錄囚. 至六月乃雨. 秋八月, 隕霜害 .
11년 봄 정월, 혜충 태자의 아들 준옹을 태자로 봉하였다.
여름 4월, 가뭄이 들자 왕이 직접 죄수를 재심사하여 형량을 낮추어 주었다. 6월에 이르러 비가 내렸다.
가을 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 十二年, 春, 京都飢疫, 王發倉 賑恤之. 夏四月, 侍中<彦昇>爲兵部令, 伊 <智原>爲侍中.
12년 봄, 서울에 기근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시중 언승이 병부령이 되고, 이찬 지원이 시중이 되었다.
● 十三年, 秋九月, 國東, 蝗害 , 大水山崩. 侍中<智原>免, 阿 <金三朝>爲侍中.
13년 가을 9월, 동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치고, 홍수가 발생하여 산이 무너졌다.
시중 지원이 사직하였다. 아찬 김 삼조가 시중이 되었다.
● 十四年, 春三月, 宮南樓橋災. <望德寺>二塔相擊. 夏六月, 旱. <屈自郡><石南烏>大舍妻, 一産三男一女.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唐書』云: "<貞元>十四年, <敬信>死." 『通鑑』云: "<貞元>十六年, <敬信>死." 以本史孝{考} 之, 『通鑑』, 誤.]
14년 봄 3월, 대궐 남쪽의 누교(樓橋)에 화재가 났다. 망덕사의 두 탑이 서로 부딪쳤다.
여름 6월, 가뭄이 들었다. 굴자군 대사 석남오의 아내가 한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
[[당서]에는 '정원 14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정원 16년에 경신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본 사기를 기준으로 고찰하면 [통감]이 틀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