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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대 헌안왕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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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憲安王>立. 諱<誼靖>[一云<祐靖>.], <神武王>之異母弟也. 母<照明>夫人, <宣康王>之女. 以<文聖>顧命卽位, 大赦,拜伊 <金安>爲上大等.
헌안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의정[우정이라고도 한다.]이며, 신무왕의 이복 아우이다. 그의 어머니는 조명부인이니 선강왕의 딸이다. 문성왕의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고, 이찬 김 안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
● 二年, 春正月, 親祀神宮. 夏四月, 降霜. 自五月至秋七月, 不雨. <唐城郡>南河岸, 有大魚出, 長四十步, 高六丈{尺} .
2년 봄 정월,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지냈다. 여름 4월, 서리가 내렸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당성군 남쪽 강변에서 큰 고기가 나왔는데, 길이가 40보, 넓이가 6척이었다.
● 三年, 春, 貴人饑, 王遣使賑救. 夏四月, 敎修完 防勸農.
3년 봄,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특사를 보내 구제하였다.
여름 4월, 왕이 교서를 내려, 제방을 축수하고 농사짓기를 권하였다.
● 四年, 秋九月, 王會群臣於<臨海殿>, 王族<膺廉>年十五歲, 預坐焉. 王欲觀其志, 忽問曰: "汝游學有日矣, 得無見善人者乎?"答曰: "臣嘗見三人, 竊以爲有善行也." 王曰: "何如?" 曰: "一高門子弟, 其與人也, 不自先而處於下. 一家富於財, 可以侈衣服, 而常以麻紵自喜. 一有勢榮, 而未嘗以其勢加人, 臣所見如此." 王聞之默然, 與王后耳語曰: "朕閱人多矣, 無如<膺廉>者. " 意以女妻之, 顧謂<膺廉>曰: "願郞自愛. 朕有息女, 使之薦枕." 更置酒同飮, 從容言曰: "吾有二女, 兄今年二十歲, 弟十九歲, 惟郞所娶!" <膺廉>辭不獲, 起拜謝, 便歸家告父母. 父母言: "聞王二女容色, 兄不如弟, 若不得已, 宜娶其弟." 然尙疑未決, 乃問<興輪寺>僧. 僧曰: "娶兄則有三益, 弟則反是, 有三損." <膺廉>乃奏: "臣不敢自決, 惟王命是從." 於是, 王長女出降焉.
4년 가을 9월, 왕이 임해전에 여러 신하들을 모았을 때, 왕족 응렴이 열 다섯 살의 나이로 이 자리에 참석하였다.
왕이 그의 생각을 알고자 하여 갑자기 "네가 상당 기간 사방을 유력하며 견학한 바 있는데, 착한 사람을 본 일이 없었던가? "라고 물었다. 그는 "제가 일찌기 세 사람을 보았는데, 그들은 착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어떤 행위인가?"라고 물었다. 그는 "한 사람은 높은 가문의 자제로서, 다른 사람과 교제함에 있어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남의 아래에 처하였으며, 한 사람은 재물이 많아 사치스러운 의복을 입을 만한데도 언제나 베옷을 입는 것으로 자족하였으며, 한 사람은 세도와 영화를 누리면서, 한 번도 남에게 세도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것은 이와 같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잠자코 있다가 왕후에게 귓속 말로 "내가 사람을 많이 겪었지만 응렴 같은 자는 없었다"라고 말하고, 사위를 삼을 생각으로 응렴을 돌아 보고 말했다. "그대는 자중자애하라. 내가 딸이 있으니 사위를 삼도록 하겠다. " 왕은 다시 술을 가져오게하여 함께 마시면서 조용히 말했다. "내가 딸이 둘 있는데, 형은 금년에 스무살이요, 동생은 열 아홉살인데 그대의 마음에 드는 대로 장가를 들라!" 응렴이 사양할 수 없어 일어나 절을 하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곧 집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이 사실을 말했다. 그의 부모는 "듣건대 왕의 두 딸의 얼굴은 형이 동생만 못하다고 하니, 만약 부득이 장가를 가야 한다면, 동생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응렴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흥륜사 중에게 물었다. 그 중은 "형에게 장가를 들면 세 가지 이익이 있을 것이요, 동생에게 장가를 들면 반대로 세가지 손해를 볼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응렴이 곧 "제가 감히 마음 대로 결정을 못하겠사오니, 다만 왕의 명령에 따르겠나이다"라고 아뢰니, 이에 왕이 맏딸을 시집 보냈다.
● 五年, 春正月, 王寢疾彌留, 謂左右曰: "寡人不幸, 無男子有女. 吾邦故事, 雖有<善德>·<眞德>二女主, 然近於牝?之晨, 不可法也. 甥<膺廉>, 年雖幼少, 有老成之德. 卿等, 立而事之, 必不墜祖宗之令緖, 則寡人死, 且不朽矣." 是月二十九日, 薨. 諡曰<憲安>, 葬于<孔雀趾>.
5년 봄 정월, 왕이 병으로 누워 위독해지자, 측근들에게 말했다. "과인이 불행하게 아들 없이 딸만 두었다. 우리 나라에는 예전에 선덕·진덕 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한 일로써, 이를 본받을 수는 없다. 사위인 응렴은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성숙한 덕성을 갖추고 있다. 그대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워 섬긴다면, 반드시 조종의 훌륭한 후계자를 잃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죽은 이후에도 나라에 해로운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달 29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