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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대 경순왕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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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敬順王>立. 諱<傅>, <文聖大王>之裔孫, <孝宗>伊 之子也, 母<桂娥太后>. 爲<甄萱> 所擧卽位. 擧前王屍, 殯於西堂, 與群下慟哭. 上諡曰<景哀>, 葬<南山><蟹目嶺>, <太祖>遣使弔祭.
경순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부이고, 문성대왕의 후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계아 태후이다. 부는 견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왕은 전 왕의 시체를 서쪽 대청에 모시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였다.
시호를 올려 경애라 하고,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케 하였다.
● 元年, 十一月, 追尊考爲<神興大王>, 母爲王太后. 十二月, <甄萱>侵<大木郡>, 燒盡田野積聚.
원년 11월, 왕의 아버지를 신흥대왕, 어머니를 왕태후로 추존하였다.
12월, 견훤이 대목군에 침입하여, 논밭에 있던 노적가리를 모두 불태웠다.
● 二年, 春正月, <高麗>將<金相>與<草八城>賊<興宗>戰, 不克死之. 夏五月, <康州>將軍<有文>, 降於<甄萱>. 六月, 地震. 秋八月, <甄萱>命將軍<官昕>, 築城於<陽山>, <太祖>命<命旨城>將軍<王忠>, 率兵擊走之. <甄萱>進屯於<大耶城>下, 分遣軍士, 芟取<大木郡>禾稼. 冬十月, <甄萱>攻陷<武谷城>.
2년 봄 정월, 고려 장수 김 상이 초팔성의 도적 흥종과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고전사하였다. 여름 5월, 강주 장군 유문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지진이있었다. 가을 8월,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게 하자, 태조가 명지성의 장군 왕 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쫓아내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 아래에 주둔하면서, 군사들을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 갔다. 겨울 10월, 견훤이 무곡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 三年, 夏六月, <天竺國><三藏摩 羅>抵<高麗>. 秋七月, <甄萱>攻<義成府城{義城府城}> , <高麗>將<洪述>出戰, 不克死之. <順州>將軍<元逢>, 降於<甄萱>. <太祖>聞之怒, 然以<元逢>前功, 宥之, 但改<順州>爲縣. 冬十月, <甄萱>圍<加恩縣>, 不克而歸.
3년 여름 6월, 천축국의 삼장마후라가 고려에 왔다. 가을 7월, 견훤이 의성부성을 공격하므로, 고려 장수 홍술이 그들과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순주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이 말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의 전공을 생각하여 용서하고, 다만 순주를 현으로 고쳤다. 겨울 10월, 견훤이 가은현을 포위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四年, 春正月, <載巖城>將軍<善弼>降<高麗>, <太祖>厚禮待之, 稱爲尙父. 初, <太祖>將通好 <新羅>, <善弼>引導之, 至是降也, 念其有功且老, 故寵褒之. <太祖>與<甄萱>戰<古昌郡><甁山>之下, 大捷, 殺虜甚衆. 其<永安>·<河曲>·<直明>·<松生>等三十餘郡縣, 相次降於<太祖>. 二月, <太祖>遣使告捷, 王報聘兼請相會. 秋九月, 國東沿海州郡部落, 盡降於<太祖>.
4년 봄 정월, 재암성 장군 선필이 고려에 투항하였다. 태조가 그를 후하게 예우하고 상보라고 불렀다. 예전에 태조가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할 때 선필이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그가 항복해오자 태조가 그의 공로와 연로함을 참작하여 은총을 베풀고 표창하였다. 태조는 고창군 병산 아래에서 견훤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견훤의 영향하에 있던 영안·하곡·직명·송생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태조에게 투항 하였다. 2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와 승전한 소식을 전해주었다. 왕이 보답으로 사신을 보내고 만날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동해 주변에 있는 주와 군의 부락이 모두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 五年, 春二月, <太祖>率五十餘騎, 至京畿通謁. 王與百官郊迎, 入宮相對, 曲盡情禮. 置宴於 <臨海殿>, 酒 , 王言曰: "吾以不天, 致禍亂. <甄萱>恣行不義, 喪我國家, 何痛如之." 因泫然涕泣, 左右無不鳴咽, <太祖>亦流涕慰藉. 因留數旬廻駕, 王送至<穴城>, 以堂弟<裕廉>爲質, 隨駕焉. <太祖>麾下軍士肅正, 不犯秋毫, 都人士女相慶曰: "昔<甄>氏之來也, 如逢豺虎; 今王公之至也, 如見父母." 秋八月, <太祖>遣使, 遺王以錦彩·鞍馬, 幷賜群僚將士布帛, 有差.
5년 봄 2월,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울 근방에 와서 왕을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서 영접하여 대궐로 들어 와서 마주 대하며, 진정한 예우를 극진히 하였다.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어 술이 취하자 왕이 말했다. "내가 하늘의 도움을 얻지 못하여 점점 환란이 닥쳐오고 있다. 견훤이 불의의 행동을 자행하여 나의 나라를 망치고 있으니, 어떠한 통분이 이와 같을 것인가?" 왕이 말을 마치고 눈물을 흘리자, 좌우에서 목이 메어 흐느끼지 않는 자가 없었고, 태조도 또한 눈물을 흘리면서 위로하였다. 이로부터 태조가 수십 일 체류하다가 돌아가려 하므로 왕이 혈성까지 나가서 송별하고, 종제 유렴을 볼모로 삼아 태조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의 군사들의 규율이 엄정하여, 조금도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없었으니, 서울에 사는 남녀가 서로 기뻐하면서 "이전에 견훤이 왔을 때는 마치 범이나 이리 떼를 만난 것 같았는데, 오늘 왕공이 왔을 때는 부모를 만난 것 같았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8월,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주고, 동시에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정도에 따라 포백을 주었다.
● 六年, 春正月, 地震. 夏四月, 遣便{使} 執事侍郞<金 >, 副使司賓卿<李儒>, 入<唐>朝貢.
6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4월, 사신으로 집사 시랑 김 불, 부사로 사빈경 이 유를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 七年, <唐><明宗>遣使<高麗>, 錫命.
7년, 후당 명종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책명을 주었다.
● 八年, 秋九月, 老人星見. <運州>界三十餘郡縣降於<太祖>.
8년 가을 9월, 남극성이 나타났다.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투항하였다.
● 九年, 冬十月, 王以四方土地, 盡爲他有, 國弱勢孤, 不能自安, 乃與群下謀, 擧土降<太祖>. 群臣之議, 或以爲可, 或以爲不可. 王子曰: "國之存亡, 必有天命, 只合與忠臣義士, 收合民心, 自固力盡而後已, 豈宜以一千年社稷, 一旦輕以與人?" 王曰: "孤危若此, 勢不能全. 旣不能强, 又不能弱, 至使無辜之民, 肝腦塗地, 吾所不能忍也." 乃使侍郞<金封休>, 齎書請降於<太祖>. 王子哭泣辭王, 徑歸<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 十一月, <太祖>受王書, 送大相 <王鐵>等迎之. 王率百寮, 發自王都, 歸于<太祖>. 香車寶馬, 連亘三十餘里, 道路塡咽, 觀者如堵. <太祖>出郊迎勞, 賜宮東甲第一區, 以長女<樂浪公主>妻之. 十二月, 封爲<正承公{正丞公}> , 位在太子之上, 給祿一千石, 侍從員將, 皆錄用之. 改<新羅>爲<慶州>, 以爲公之食邑. 初, <新羅>之降也, <太祖>其{甚} 喜, 旣待之以厚禮, 使告曰: "今王以國與寡人, 其爲賜大矣. 願結昏於宗室, 以永甥舅之好." 答曰: "我伯父<億廉> 干, 知<大耶郡>事, 其女子德容雙美, 非是, 無以備內政." <太祖>遂取之生子, 是<顯宗>之考, 追封爲<安宗>. 至<景宗><獻和大王>, 聘<正承公>女, 納爲王妃, 仍封<正承公>爲尙父令. 公至大<宋><興國>四{三} 年戊寅, 薨, 諡曰 <敬順>[一云<孝哀>.]. 國人自始祖至此, 分爲三代. 自初至<眞德>二十八王, 謂之上代; 自<武烈>至<惠恭>八王, 謂之中代; 自<宣德>至<敬順>二十王, 謂之下代云.
● 論曰: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 輔行. 詣<佑神?>, 見一堂設女仙像. ?伴學士<王乷>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乃泛海抵<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 學而講習, 于以襲聖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 , 至使閭里, 比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於是時也, <景哀>加之以荒樂, 與宮人左右, 出遊<鮑石亭>, 置酒燕, 不知<甄萱>之至, 與夫門外
<韓擒虎>·樓頭<張麗華>, 無以異矣. 若<敬順>之歸命<太祖>, 雖非獲已, 亦可嘉矣. 向若力戰守死, 以抗王師, 至於力屈勢窮, 則必覆其宗族, 害及于無辜之民. 而乃不待告命, 封府庫籍郡縣, 以歸之, 其有功於朝廷, 有德於生民, 甚大. 昔, <錢>氏以<吳>·<越>入<宋>, <蘇子瞻>謂之忠臣, 今<新羅>功德, 過於彼遠矣. 我<太祖>, 妃嬪衆多, 其子孫亦繁衍, 而<顯宗>自<新羅>外孫, 卽寶位, 此後繼統者, 皆其子孫, 豈非陰德之報者歟!
三國史記第十二.
9년 겨울 10월, 사방의 국토가 모두 타인의 소유로 되어, 국세가 약하고 고립되었으므로, 왕은 나라를 스스로 보존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였으나, 옳다는 사람도 있었고, 옳지 않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 왕자가 "나라의 존속과 멸망은 반드시 하늘의 운명에 달려 있으니, 다만 충신 의사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우리 자신을 공고히 하고 힘이 다한 뒤에 망할지언정, 어찌 1천년의 역사를 가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왕은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못하고 약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곧 시랑 김 봉휴로 하여금 태조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왕자는 통곡하면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산길을 따라 개골산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위 아래에 집을 짓고, 삼베 옷을 입고 풀잎을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11월, 태조가 왕의 편지를 받고, 대상 왕 철 등을 보내 왕을 영접하게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태조에게 가는데,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 태조가 교외에 나와서 왕을 영접하여 위로하였으며, 왕궁 동쪽의 가장 좋은 구역을 주고, 맏딸 낙랑 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 왕을 정승공으로 봉하여,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으로 1천 석을 주고, 시종하던 관원과 장수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신라를 개칭하여 경주라 하고, 이를 공의 식읍으로 삼았다. 처음신라가 항복하였을 때,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우하였고, 사자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이제 왕이 나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이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원컨대 저의 종실과 혼인하여, 영원히 집안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나의 백부 잡간 억렴이 지대야군사로 있는데, 그의 딸이 덕행이 훌륭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니, 이 외에는 집안을 받들 만한 자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마침내 그 여자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 사람이 곧 현종의 아버지로서, 후에 안종으로 추봉되었다.
경종 헌화대왕 때에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보령으로 봉하였다.
공이 송 나라 흥국 4년 무인에 죽으니, 호를 경순[효애라고도 한다.]이라 하였다. 신라 시조로부터 이 때에 이르기까지를 3대로 구분하니, 초대부터 진덕왕까지 28왕을 상대라 하고, 무열왕으로부터 혜공왕까지 8왕을 중대라 하고, 선덕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20왕을 하대라고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으며, 김씨는 금궤에 들어 있다가 하늘로부터 하강하였거나 혹은 금수레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세속에서는 이것이 대대로 전해 내려와 사실로 알려져 있다. 정화 연간에 우리 나라에서 상서 이 자량을 송 나라에 보내 조공할 때, 신 부식은 글 쓰는 임무를 맡아 보좌로 가게 되었다. 우리가 우신관에 이르렀을 때 마루 한 편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 놓은것을 보았다. 숙소에서 접대를 맡은 학사 왕 보가 "이는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는가?"라 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어떤 제왕의 딸이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하자 남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녀는 곧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사람이 해동의 첫임금이 되었고, 제왕의 딸은 땅의 신선이 되어, 영원히 선도산에 살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녀의 화상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한 송 나라 사신 왕 양이 지은 동신성모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창건하였다."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고, 이 동방의 신이 곧 선도산의 신성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선녀의 아들이 언제 왕 노릇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고, 이제 다만 이러한 전설이 생긴 시초를 고찰해 본 것이다.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자들은,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우며, 관직은 간략히 두고, 일의 처리는 간편하게 하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어, 산 넘고 바다 건너 예방하는 사신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의 조정에 나아가 숙위하게 하였으며, 국학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게 하였으니, 여기에서 성현의 교화를 받았기 때문에 미개하고 거칠던 풍속을 바꾸어 예의가 있는 나라를 만들었다. 또한 신라는 중국 군사의 위세를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그 지역을 취하여 군현으로 만들었으니, 가히 성대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라는 불가의 법을 받들고, 그 폐해를 깨닫지 못하였으며, 심지어 마을에도 탑과 절간이 늘어서고, 백성들이 사찰로 도피하여 승려가 되었으니, 군사와 농사 지을 사람이 점점 줄어 들고, 나라는 날로 쇠퇴하게 되었으니, 어찌 나라가 문란하지 않고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겠는가?
이 때에 이르러서 경애왕은 더욱 황음하게 되어, 궁인과 근신을 데리고 포석정에 나가 놀면서 술을 마시며 연회를 하다가 견훤이 오는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문 밖에 한 금호가 온 것을 모른 것이나, 누각 위에서 장 여화를 데리고 놀다가 화를 당하였던 것과 다름이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귀순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일이기는 하지만 또한 가상한 일이었다.
그 당시에 만약 목숨을 걸고 태조의 군사와 싸워서,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하여졌다면, 필히 그의 일족은 멸망하고, 무고한 백성들에게도 해가 미쳤을 것이다.그러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나라의 창고를 봉하고, 군현을 기록하여 태조에게 귀의하였으니, 그가 고려에 세운 공로와 백성들에게 입힌 은덕이 매우 크다할 것이다.옛날 전씨가 오와 월의 국토를 송 나라에 바친 것을 두고, 소 자첨은 그를 충신이라고 하였으니, 지금 신라의 공덕은 그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것이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많았고, 그의 자손들 역시 번창하였는데도, 현종은 신라의 외손으로서 왕위에 오르게 되었고, 그를 계승한 자들이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어찌 위와 같은 음덕의 보답이 아니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 12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