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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왕계통보

본문

ma01.png 7대 지증왕본기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勿王{奈勿王}> 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麻立干}> 之再從弟也. 母, <金>氏<鳥生>夫人, <訥祗王>之女; 妃, <朴>氏<延帝>夫人, <登欣>伊 女. 王體鴻大,

瞻{膽} 力過人. 前王薨, 無子, 故繼位, 時年六十四歲.

 

論曰: <新羅>王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

<羅>末名儒<崔致遠>作『帝王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

言鄙野不足稱也. 曰『左』·『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

"·<匈奴>語"撑犁孤塗"等. 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이다.[혹은 지도로 또는 지철로라고도 한다.]

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왕비는 박씨 연제부인이며 등흔 이찬의 딸이다. 왕은 체격이 크고 담력이 뛰어났다.

전 임금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그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저자의 견해 : 신라의 왕 가운데 거서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이며, 차차웅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하나,이사금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열 여섯, 마립간 칭호를 사용한 경우가 넷이다.

 

신라 말년의 명유 최 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이들을 모두 왕이라고 불렀고, 거서간 등으로는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이유로 그 용어가 천박하여 부를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길 것인가?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역사서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오히려 초나라 용어인 '곡오도( 於 )'와 흉노 용어인 '탱리고도(撑梨孤塗)'라는 말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제 신라의 사적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방언을 그대로 기록해두는 것이 또한 옳다고 생각한다.

 

三{二} 年, 春三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3년 봄 3월, 순장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이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각 다섯 명씩을 순장하였는데,이 때에 와서 폐지되었다.

왕이 직접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주주와 군주에게 일일이 명령하여 농사를 권장토록 하였다.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기 시작하였다.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 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4년 겨울 10월,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시조가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나라 이름을 아직 정하지 못한 채 사라라고 부르기도 하고, 사로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며또는 신라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新)'은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모두 덮는다는 뜻이므로'신라'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예로부터 나라의 군주를 살펴보면, 모두 '제(帝)'나 '왕'으로 칭호를 삼았는데,

우리 시조가 나라를 창건하고 지금까지 22대가 되도록 오직 방언으로 왕호를 삼았을 뿐 아직도 존귀한 칭호를 정하지 못했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립니다

."왕이 이를 따랐다.

 

五年, 夏四月, 制喪服法頒行. 秋九月, 徵役夫, 築<波里>·<彌實>·<珍德>·<骨火>等十二城.

5년 여름 4월, 상복법(喪服法)을 제정하여 반포 시행하였다.

가을 9월, 일할 사람을 징발하여 파리, 미실, 진덕, 골화 등의 열두 개 성을 쌓았다.

 

六年, 春二月, 王親定國內州郡縣. 置<悉直州>, 以<異斯夫>爲軍主, 軍主之名, 始於此. 冬十一月, 始命所司藏氷, 又制舟楫之利.

6년 봄 2월, 왕이 직접 국내의 주와 군과 현을 정하였다. 실직주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군주로 임명하였다.

군주라는 칭호는 이에서 시작되었다.

겨울 11월, 처음으로 소관 부서에 명하여 얼음을 저장하게 하고, 또한 선박의 이용을 제도화 하였다.

 

七年, 春夏旱, 民饑, 發倉賑救.

7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十年, 春正月, 置京都東市. 三月, 設檻穽, 以除猛獸之害. 秋七月, 隕霜殺菽.

10년 봄 정월, 서울에 동시장을 설치하였다.

3월, 나무 울타리와 함정을 만들어 맹수의 피해를 없애도록 하였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콩이 죽었다.

 

十一年, 夏五月, 地震壞人屋, 有死者. 冬十月, 雷.

11년 여름 5월, 지진이 발생하여 민가가 쓰러지고 사람이 죽었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 不服.

伊 <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獅} 子, 分載戰船, {抵} 其國海岸, ?

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13년 여름 6월, 우산국이 귀순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 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十五年, 春正月, 置小京於<阿尸村>, 秋七月, 徙六部及南地人戶, 充實之. 王薨, 諡曰<智證>. <新羅>諡法, 始於此.

15년 봄 정월, 아시촌에 소경을 설치하고, 가을 7월에 6부와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하여,

이 곳에 도시의 면모를 갖추었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지증이라 하였다.

신라의 시호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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